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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한국독립운동 31 의 고야마(小山)가 응급처치했지만, 곧 절명했다. 이토의 죽음은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일본에서는 주요 신문들이 호외(號外)를 발행하여 이토의 사망을 전했고, 국내외의 많은 애국지사와 동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다. 중국은 흡사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국내의 일부 친일파들은 한국통감부를 방문하여 조문하고 사죄단을 파견해 야 한다고 법석을 떨기도 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간단 한 조사를 받고 당일 저녁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계 된다. 거사가 이루어진 곳은 러시아 관할구역이었으 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재외 한국인에 대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있다는 이유를 일본이 러시아 에 들이댄 것이었다. 천국에서도 꿈꾼 동양평화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지하에서 7박8일 동안 심문을 받은 후 11월 3일 별도로 체포된 우덕 순, 조도선, 유동하 등 동지들과 함께 뤼순(旅順) 감 옥으로 이송되었다. 뤼순으로 온 뒤 안중근은 미조 부치[購淵] 검사로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는다. 이 토를 살해한 이유를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안중근은 ‘이토의 죄악 15개 조’를 열거하여 심문하던 검찰관 을 당황하게 했다. 1910년 2월 7일부터 안중근을 비롯한 4명의 동지 는 뤼순 관동도독부 법정에서 모두 여섯 차례의 공 판을 받는다. 외국인과 많은 기자 등 방청객이 빼곡 히 들어찬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은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 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 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한국의 독 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고 의거의 성격을 당당히 밝힌다.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 고되었다. 일제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된, 국제법을 무시한 부당한 재판의 결과였다. 사형이 확정된 이후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그리고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와 같은 자 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은 많은 유묵을 써서 일본인 에게 나누어 주었다. 항소를 포기하면 동양평화론 을 집필할 시간을 주겠다던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 石)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어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유고(遺稿)로 남게 되었다. 3월 10일 빌렘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음으로써 신 앙인으로서의 의식을 마친 안중근은 형 집행 하루 전인 3월 25일 마지막으로 두 동생을 면회하였다. 안중근은 모친, 부인, 빌렘 신부 등에게 보내는 여섯 통의 유서를 전달하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에 반장(返葬) 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나라의 국 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 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 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