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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박은식의 역사 인식과 독립운동  31 박은식은 독립운동의 사상적 뿌리를  만든 사학자, 독립운동가였다. 『한국 통사』에서는 조선 멸망의 원인을 통 렬하게 반성하며 민족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에서는 갑신정변부터 3·1운동에 이 르는 항일 투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 였다. 그는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라 말하며, 국권은 상실했지 만 국혼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 독립 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닌, 오늘 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삶의 표본이 다. 그의 생애는 격동의 시기에 조국 을 위해,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친 한  지식인의 고귀한 투쟁사였으며, 동시 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혼’의 중요 성을 강조한 박은식의 정신은, 위기 를 맞이할 때마다 그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 가슴속에서 살아날 것이다. 박은식의 출생과 수학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황해도 황주군의 한 바닷가 마을에서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격변 중이었다. 중국은 아편전 쟁을 겪으며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고, 일본은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메이지유신을 단행해 입헌군주제와 천황제를 확립했다. 일본은 이후  조선과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적 야욕을 드러냈다. 반면 조선은 외부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하며 여전히 전통적 질서에 머물러 있었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난 박은식은 이른 나이에 공부를 시키면 단명한 다는 속설로 인해 또래보다 늦은 열 살에 서당에 입학했다. 입학 후 뛰 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며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7세에 부친상을 당해  3년 상을 치른 후 결혼했고, 이후 다산 정약용의 학맥을 이은 신기영,  정관섭 등에게서 고문학과 다산의 실학을 배웠다.  박은식은 진정한 학문의 목적이 과거 합격이나 출세가 아니라 백성 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24세 때 서울로 올라온 그 는 임오군란(1882)을 직접 목격하며 세도 정권의 부패가 폭동의 원인 임을 알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였다. 이후 평안도에서 성리학을 깊 이 연구했고, 1885년 향시(鄕試)에 합격해 숭인전 참봉, 동명왕릉 참 봉 등 관직을 거쳤다. 관찰사 민병석 등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은거했다. 당시 그는 동학농민운동 과 의병운동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으나, 이후 3·1운동을 거치며 인식 이 변화했다. 1898년경 박은식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구 문명과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그는 주자학에만 머물던 자신이 시대에 뒤처졌음을 자각하고,  노자·장자·불교·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과 사회진화론, 민약론, 『법의 정 신』 등 서구 학설을 섭렵했다. 특히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 氷室文集)』을 통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우승열패 등 경쟁의 원리를 강조하며,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 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회진화론의 경쟁 원리가 국제사회에 서 힘의 논리와 제국주의 침략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고 보았으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