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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한국독립운동 29 무장투쟁과 역사를 뒤흔든 하얼빈의거 교육계몽운동에 전념하던 안중근을 무장투쟁 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곧 일본의 ‘통감정치(統監 政治)’였다. 일본은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 을 빌미로 고종(광무황제)을 강제 폐위시키더니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군대를 해산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였다. “교육으로 백년대계(百年大計)는 가능하나 당 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라고 한 안중 근은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위 해 국외로 떠난다. 부산에서 배편으로 떠난 안중근은 북간도를 거 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한인의 대부’ 최재형 (崔在亨)의 후원을 받아 동의회(同義會)를 창설한 다. 안중근은 멀리 하바롭스크로부터 아래로 지 신허(地新墟)까지 방대한 지역을 돌며 동포들을 상대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1908년 6월 이범윤(李範允)과 전제익이 연합한 연해주 의군은 드디어 국내 진공을 시작한다. 안 중근은 우영장(右營將)으로서 100여 명의 병력을 맡아 작전에 참여한다. 작전 초기 안중근 부대는 적군을 패퇴시키고 일본군 수 명을 사로잡는 전 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안중근은 만국공법(萬國公 法)과 인도주의에 따라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석 방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 되는 바람에 일본군의 추격을 당하게 되고 결국 패퇴하여, 한 달 여의 사투 끝에 겨우 러시아 연해 주로 귀환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을 실패한 안중근 은 다시 의병 결성과 활동을 위한 지원을 시도하 안중근의 ‘대한독립’혈서 태극기 안중근이 밝힌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이상 안중근의사기념 관 제공)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