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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잊혀져 가는 의병정신, 다시 소환해야 29 중봉은 관직을 사임하고 옥천 향리로 돌아갔다. 한적한 곳에서 글을 읽으며 일생을 마치려 했던 중봉은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 우리의 형세를 엿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또다시 관찰사를 통해 상소를 올렸는데, 관찰사는 그 소(疏)를 또다시 올리지 않았 다. 이렇게 되자 중봉은 걸어서 대궐 앞에 나아가 다 시 지은 소와 앞서 올리지 못했던 소를 모두 올렸다. 이 상소에는 일본에 대한 대비책과 더불어 당시 조 정 대신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들어 있었다. 재상 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재상을 임명한 임금을 공격하 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조는 크게 노해 그 상소를 불 태워 버렸다. 이렇게 되자 중봉은 도끼를 들고 대궐로 나아가 상소를 올려버린다. 자신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 다면 자신이 틀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니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칠 것이며, 만약에 자신의 의견이 옳다 면 수용하라는 강한 압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선조 는 ‘도끼상소’를 올린 중봉을 유배보냈다. 귀양에서 풀려난 중봉은 1591년 3월에 왜국의 사 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백의(白衣)로 걸어와 또다시 상소를 올렸다.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 박한 상태이니 왜국사신의 목을 베고 중국 등 이웃 나라 들과 함께 왜적을 대비하자며 대궐 앞에서 임금의 비답을 기다렸지만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중봉의 얼굴에는 피가 가득하였다. 1592년 4월 중봉의 우려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 다. 자신을 귀양보냈던 그 임금을 근왕(勤王)하고자 중봉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600여 명의 의 병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한 후 금산성에서 왜군과 싸웠다. 왜군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모두 패했 으나, 중봉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 다. 왜군이 마침내 장막 안까지 돌입하자, 빨리 피하 라는 부장들의 간절한 호소에 중봉은 말안장을 풀어 버렸다. 죽을 자리를 정한 것이다. 조헌의 군사들 가 운데 죽음을 모면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라는 멸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사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보고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지고지순(至高至純) 한 행위가 바로 ‘순국’이다. 순국의 의미는 어디서 찾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2024년 9월 23일 충남 금산  칠백의총에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칠백의사가 모셔진  묘역을 관계자들과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제공). 조헌의 문집 『중봉집(重峯集)』 (미리벌민속박물관 소장) 중봉 조헌 초상화(위키백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