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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23 1.4배가량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장현은 아전들의 기질이 너무 억세고 텃세도 심한 탓에 주로 문과급제자 출신의 권위 있는 현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들 지역에서 예전부터 전해오는 “고 창은 성(城) 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드센) 아전 자랑”한다는 말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행정구역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895년의 갑오개혁이었다. 1894년 청일전 쟁의 승리로 조선의 주도권을 쥔 일제는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조선의 전통적 정치⋅사회 시스템을 완전히 쇄신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이는 일제가 향후 조선을 원활히 간섭하고 지배하기 위한 의도가 바탕에 있었기에, 비록 ‘근대’의 탈을 쓰고 있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타율적 개혁이라는 한계를 지 니고 있었다. 이때 일제는 500년간 지속되어 오던 전국 8도 체제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23부의 광역 체제로 전환했으며, 그 산하에 기존의 부⋅목⋅군현에 해당되었던 대소행정구역을 모두 군(郡)으로 단일화시켰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모든 고을을 군으로 통일시켰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고을 규모를 반영하여 1등에서 5등까지 편차를 두었다. 따라서 이때 세 고을은 모두 전주부에 소속된 무장군⋅흥덕군⋅고 창군이 되었는데, 무장군은 2등군, 흥덕군은 3등군, 고창군은 4등군으로 지위에 차등이 있었다. 당 시 전국적으로 2등군은 매우 보기 드물 정도로 높은 등급이었는데, 무장이 2등군이라는 것은 그만큼 과거로부터의 위상이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당시 자료에 의하면 무장군은 당시 전라도 32개 군 중에서 7번째에 해당했다고 한다. 그 이듬해인 1896년에는 23부 체제가 다시 도 제도로 환원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13도 체제가 되었지만, 그 하위의 고을들은 1914년까지 군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1896년 13도 체제가 되면서 전라도가 전라남⋅북도로 나뉘었을 때 고창과 흥덕은 전라북 도로 편입되었지만, 무장은 전라남도에 속했다는 것이다. 사실 무장은 물론이고 고창 역시도 그 거 리로 보면, 전주보다 광주가 훨씬 가깝다. 무장면에서 전주의 전북도청까지는 대략 80km인 반면 , 광주시청까지는 50km에 불과하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이는 1917년에 통합 고창군 지역의 장로 교회들이 전남 장로교의 모임인 ‘전남노회’로 들어가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어쨌든 무 장은 전남에서 전북으로 소속이 변경된 1907년까지 11년 가량 전남에 속했다 사실이다. 1895년과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이 비록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고을과 고을간의 통 폐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 개국 이래로 대한제국 멸망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구역의 근간은 유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1914년 4월에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즉 일제는 식민 통치의 편의를 위해 경성 부를 비롯한 거점도시 12부를 두는 것과 더불어, 전국의 군을 통폐합함으로써 면적과 인구, 경제력 의 규모를 조정했다. 그 결과 전국의 군 수가 332개에서 220개로 3분의 1이나 대폭 축소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