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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거리로 나온 양심수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로 이루어진 6.29 선언 이후, 전두환 정권은 대규모 양심수 사면을 실행했습니다. 집회와 관련되어 구속 수감 중이던 177명이 1차로 석방되고, 7월 특별사면 1,615명과 특별감형 512명 등 총 2,355명이 사면 복권되었습니다.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던 양심수들이 마침내 철문을 열고 거리로,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극렬 및 용공 분자를 선별해 석방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전국 각지 교도소의 양심수들과 그 가족,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 조건 없는 양심수 전원 석방'과 '정치범 수배 해제', '국가보안법 집시법 언론기본법 철폐'를 요구하며 무기한 옥중 단식과 공동 투쟁을 함께 이어갔습니다. 0.7평 독방을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양심수들은 일상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조직을 꾸려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어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면서, 노동자 출신 양심수들은 전국적인 노동조합 결성과 연쇄 파업, 임금 인상과 노동권 쟁취 투쟁의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사회 각계각층의 모순을 해결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부당한 사상 검증과 시국 사건 연루로 교단에 서지 못했던 예비 교사들은 '전국시국관련 미임용 교사발령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교육 민주화와 전원 즉각 임용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올림픽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독재정권에 의해 삶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긴 도시 빈민들과 함께 '도시노점상복지연합회'를 결성해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광장의 연대에 동참했습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승리하는 날까지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자"는 김근태의 호소처럼, 양심수들의 석방은 민주화의 끝이 아니라 사회의 불평등과 억압을 넘어서는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들은 5공 비리 책임자 처벌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이끌고,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열사들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장기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훗날 탑골공원에서 수백 차례 이어진 민가협 목요집회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인권과 평화의 시대를 향해 광장의 민주주의를 넓혀간 이들, 그들이 바로 거리로 나온 양심수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