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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5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조국광복에 헌신한 순국선열을 다시 본다’ 을 해결해 주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늑약은 안중근 의 생각과 삶에 일대 변화를 불러왔다. 일본은 청일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러일전쟁도 한국을 열강으로 부터 독립시키고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 라고 발표했지만, 1905년 전쟁이 끝나자, 한국의 독 립을 보장하기는커녕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 결하여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안중근도 일본의 처사에 분개하여 어떻게든 나라 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구국운동 에 뛰 어들게 된다.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한 안중근은 항일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자 중국으로 떠났다. 칭다오(靑島)를 거 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그곳에 자 리 잡은 한인 유력자들을 만나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지만, 그들의 비협조로 뜻 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안 중근은 그곳에서 우연히 황해도에서 전 교를 함께 했던 르 각 신부를 만나게 되 어 그의 조언으로 일단 국내에서 교육활 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1905년 12월 하순의 일이다. 고국에 도 착한 안중근을 기다린 것은 부친 안태훈 의 별세 소식이었다. 1906년 일가와 함께 진남포로 이주한 안중근은 일부 가산을 정리하여 삼흥학 교(三興學校)를 세우고 돈의학교(敦義學 校)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고 ‘서우 학회’에도 가입하는 등 교육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평양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활동에 나선다. 안중근은 “국사(國事)는 공 (公)이요, 가사(家事)는 사(私)다. 지부장인 우리 가정 이 솔선수범치 않고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고 하며, 부인은 물론 어머니, 제수씨 등이 가졌던 금붙 이 등 패물을 모두 헌납하도록 하였으며, 지역의 많 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1900년대 초 청계동 성당(가운데)과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왼쪽). 그는 천주교 황해도 담당 선교사로 안 의사 일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년을 앞두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2016년 3월 공 개한 북한 황해남도 청계동 안 의사 생가터(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