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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1981년 복원 전, 원래 옛 타루비의 비문은 한말의 호남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고예진(高禮鎭, 1875~1952) 선생이 지었다고 전해집다. 이 원문은 후손들이 정리한 역사서인 《도곡실기(桃谷實記)》와 《부안군지》에 수록되어 보존되고 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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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谷 李瑜先生은 西紀一五四五년 仁宗乙巳九月二十일 全南靈光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養父인 浪谷李億榮公을 따라 지금의 扶安郡上西面通井里桃花洞에서 살았다. 그것은 乙巳士禍에 충격을 받은 浪谷公이 은거생활을 하기위하여 邊山기슭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롭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기질와 가통을 받아 선생도 젊어서 벼슬길은 터졌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당파싸움만 하고 있기때문에 조정의 부름도 사양하고 이곳에서 性理學에 전념하였다. 한편 장인 金壽福縣監의 도움을 얻어 講舍를 증축하고 인근 음에서 선생의 높은 인격과 깊은 學識을 흠오하여 찾아오는 四百여명의 문하생들에게 절의와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선생을 桃谷處士라고 불렀다. 壬亂이 이러나자 의병장 趙重峯 金建齋에게 군량과 군기등을 보내어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丁酉再亂때는 왜적이 서해안으로 처들어오자 이 고장 扶安에서 두차례 큰 싸움이 있었으니 四月의 胡伐峙싸움과 九月의 淸嶝싸움이었다. 胡伐峙싸움에서 우리가 참패를 당하게되자 적은 더욱 기세가 높아 갖은 횡포와 만행을 자행하기 때문에 그대로 보고 참을수가 없어 노년기에 들어간 선비의 몸으로 분연히 나서 용감하게 싸운것이 淸嶝싸움이었다. 선생은 인근 읍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고 문하생 수십명을 중심으로 훈련을 시켜 적의 토벌에 나섰던 것이다. 처음 三일간은 큰 전과를 얻어 많은 적을 살상하고 三十리 밖가지 쫓아 내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