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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와 한국독립운동 27 1910년 3월 26일(토) 오전 10시 15 분. 31세의 짧은 삶을 오로지 민족 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살아온 민족 의 영웅은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평 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바라건대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 여 동양의 평화를 이루는 데 힘쓰기 를 기원하오”라고 말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의사 안중근’이 보여준 살신 성인의 자세는 강우규, 김상옥, 나석 주, 이봉창, 윤봉길 등 많은 독립운동 가에게 계승되었다. 청년기에 청계 동에서 안중근 집안과 인연을 맺었던  백범 김구는 안중근을 ‘한국독립운동 의 지주’로 받들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 모습과  정신은 독립과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 인과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혼란한 시기에 성장한 영웅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럽던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 마리아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하 였다. 부친 안태훈은 한때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유학생으로 뽑히기도 했 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1885년 일가족 80여 명을 이끌고 신 천군 두라면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은신한다. 청계동에서 성장하며 조 부에게 한학을 익힌 안중근은 어릴 적부터 집안의 포수(砲手)들과 어울 려 말타기와 사냥, 사격에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안중근은 1894년 김홍섭(金洪燮)의 딸 아려(亞麗, 아네스)와 혼인하 였으며, 이후 1녀 2남을 두게 된다. 이 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전국 으로 퍼졌다. 이에 부친 안태훈은 황해감사 정현석의 요청으로 의려소 (義旅所)를 세우고 관군을 도와 동학군과 싸우게 되었다. 안태훈이 이끄는 신천의려는 그해 12월 동학군과 일전을 치르게 되 는데 안중근은 아버지를 졸라 싸움의 선봉에 섰다. 어린 나이였지만 안 중근의 기질은 이렇게 담대한 면이 있었다. 당시 부친 안태훈은 동학군 진압 과정에서 동학군으로부터 500여 석 의 곡식을 노획하여 이를 군량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중앙 조정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안태훈은 명동성당으로 피신 하게 된다. 부친 안태훈은 이때 성서의 교리를 깨우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896년 10월 청계동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적극적 으로 포교함으로써 모든 가족 친지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안중근도 도마(多黙,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안태훈은 빌렘 (N.Joseph M. Wilhelm, 홍석구) 신부에게 청해 청계동에 천주교 공소 를 설치하기도 하고 안중근과 함께 인근 여러 마을을 찾아 교리를 전파 하는 등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안중근은 이후 몇 년 동안 빌렘 신 부의 복사(服事)가 되어 황해도 일대를 순례하면서 전교 활동에 헌신하 게 된다. 또한 천주교인들의 총대(總代)직을 맡아 교인들의 억울한 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