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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칼럼 • 금성(金城)지구 전투: 정전협정 직전의 마지막 공세, 마지막 저지선 19 거부하는 반공포로 27,000여 명을 기습적으로 석방 하였다. 단독으로 단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협정 체결을 앞둔 국제 정치 질서 속에서 한국 정부가 표 출한 강력한 외교적 거부 의사이자, 분단 고착화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로 인해, 휴전회담은 또다시 결렬되었고, 전선 은 다시 긴장 상태로 치달았다. 중공군 사령관인 펑 더화이(彭德 怀 )는 6월 20일 마오쩌둥(毛 泽东)에게 보낸 전문에서 “정전협정의 체결을 미루고 이승만의 한국군에게 다시 타격을 입히고 한국군 15,000명을 섬멸할 것”을 밝혔다. 결국,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 협상을 중단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켰다. 중공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군에 대한 보복 공세 를 계획했으며, 금성 돌출부를 주요 목표로 삼아 대 규모 보복 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의 초기 공세 성공과 국군의 반격 중공군은 1953년 7월, 금성지구 전선의 돌출된 지형을 제거하고 국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 위 해 총 12개 사단, 약 2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 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제60군, 67군, 68군, 54군에 더해 제21군이 증원된 병력으로, 국 군 제2군단 예하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지 구를 정면과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중공 군은 이에 앞서 6월 10일부터 18일까지 6개 사단으 로 예비 공세를 벌여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이어 7 월 13일부터 19일까지 본격적인 총공세를 전개하였 다. 당시 국군은 방어진지를 동굴형으로 구축하고, 아군 포병의 진내사격을 유도해 적을 격퇴하는 전술 을 운용했으나, 많은 병력이 실전 경험이 없는 신병 철수 직후 간진현에서 쉬고 있는 수도사단 1연대 장병들의 모습(출처: 백 선엽, 『나를 향해 쏴라』 3) 금성지구 전투 흑운토령 반격작전 도중 피습당한 박격포 분대원들을 보기 위해 달려 나가는 제8사단장 송요찬 소장(국가보훈부 제공)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 육군 제3사단은 금성지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57년 7월 15일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 말고개 정상에 전적비를 세웠다(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