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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자(字) 명숙(明淑). 호 해몽(海蒙) 관(貫)천안
천안전씨 족보에 의하면 이름이 철로인데 봉준은 아명인듯 하며 체구가 작고 야무져 녹두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고창읍 당촌리에서 출생하여 13세무렵까지 살다 전주 구미리, 정읍 산외면 동곡리, 그리고 이평면 양교리에서 다시 고개넘어 조소리로 이사 하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소장을 올릴때에는 아버지 전창혁이 먼저 김도삼 정일서등과 3장두로 나섰으나 전창혁이 심한 매를 맞아 장독으로 죽은뒤에 전봉준등이 고부봉기를 주도하여 2개월 이상 버터 왔으나 내부조직의 약화와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어 안핵사 이용대의 만행에 동지 수십인과 함께 무장의 손화중에게 숨어든다. 손화중과는 1892년 11월 삼례취회때부터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더불어 우리사회 부조리에 대한 변혁을 지향해왔고 1894년 2월 19일 전봉준을 비롯한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최재형 등 13명이 손화중을 설득 갑오년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당산리 구수내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동학농민혁명 1차봉기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해 초겨울 공주 우금티전투를 시작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쫓기다가 겨울이 깊어가는 11월 말 순창 피노리에서 친구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혀 일본인이 배석한 5차례의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된 후 다음날 죽을때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조금도 굽힘이 없었으며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을 담아 마지막 시 한편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 했다. 때는 1895년 3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