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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25년 6월 Column   편집위원 컬럼 작은 소리 큰 울림 하여 제도화된 첫 사례로 평가된다. 아울러, 단일 국 가(미국)가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지휘한 구조 는 냉전기 국제 군사 외교질서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선례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6·25전쟁의 유산: “FREEDOM IS NOT FREE” 6·25전쟁 당시 유엔의 신속하고 단 호한 개입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 민국의 존립은 근본적으로 위협받았 을 것이다. 이 전쟁은 냉전의 서막에 서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처음으로 무력으로 충돌한 사례였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 행정부와 유엔 안전보장이 사회의 긴급 대응에 따라 채택된 일련 의 결의안은 국제사회의 조직적 개입 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전투부대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 물자지원 38 개국 등 총 63개국(지원 의사만을 밝 힌 3개국 포함)이 참여한 국제전의 양 상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참 전국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방어했으며,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했다. 유엔군은 전사자 약 4만 명, 부상자 약 10만 명, 총 199만여 명의 참전 병력을 동원하 며 막대한 희생을 감내했다. 유엔이 집단안보 체제를 통해 무력 침략에 대응한 이 사례는 오늘날 국제 법과 군사 외교사적으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국 제사회가 연대하여 침략을 저지한 이 경험은 유엔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으 며, 다자안보 체제가 한 나라의 존립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동시에, 그 발 동으로 강대국의 정치적 의지에 좌우된다는 구조적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공원 내 19명의 참전 용사 조형물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공원 내 기억의 연못. “FREEDOM IS NOT FREE”라는 경구가 새겨 져 있다(이상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