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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정려문. 방언공은 유경(宥慶)공의 아들로 1693년 10월 2일에 출생하였으며, 아버님 병환에는 밤낮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피를 수혈하는등 효성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아들인 치화(致和)공도 아버지께서 기이한 병환을 않자, 먼저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리고 극진히 보살폈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니,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효성을 다 하였다. "아버지께서 지하로 돌아가시니, 누가 옆에서 모시겠습니까? 지하에서 아버지를 따르겠습니다." 하고는 눈물을 모두 쏟고 별세하였다. 치화공이 별세하던 날 그 아들 민형(敏炯)공은 겨우 두 살이었다. 어머니 신씨(申氏)는 “부자(父子) 분의 뛰어난 행실을 네가 힘써서 후세에 찬양하게 하라."고 교육 하였다. 그리하여 감영(監營)에 글을 올린 것이 스무 번이었는데, 임금께 아뢰어서 은혜로운 정려문이 남편인 치화(和)공께 내리게 되었다. 이에 부인 신씨는 아들로 하여금 혈서(血書)를 써서 상소케하고 화성(城)으로 행차하는 대가(大) 앞에서 하소연하여 남편의 정려문을 시아버지에게 옮겨주어 죽은 남편의 효성스러운 혼(魂)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도(道)에서 사실을 조사한 결과 두 효자(孝子)에 한 열부(烈婦)입니다." 라고 보고 하였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전교하기를 "김방언(金邦彦)과 김치화(金致和) 부자(父子)를 표창하여 정려하는 일은 신녀(中女)의 효성에 감동한 소치이다. 해당 고을로 하여금 이 전교(佛敎)의 내용을 신녀(女)에게 타일러 가르쳐 주며, 판부(判付)한 내용을 한문(漢文)과 언문(文)으로 등사하여 길거리에 게시해서 온 도의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는 자료로 삼게 하라." 계묘(1783)년 5월에 양세정려문(兩世間門)을 하사 하였다. 방언공의 묘소는 광복사 옆에, 치화공 및 부인 신씨, 그의 아들 민형의 묘소는 백월산 및 태겨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