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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옛 동지들과의 못다 한 이야기 전북폭발탄사건 관련 박영관 동지들의 출옥 후 행적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어느 정도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박영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 조인현은 안타깝게도 전주형무소의 마지막 선고공판 이후 전혀 소식을 알 수 없다. 당시 조인현과 송시용은 법정 선고에 불복하여 항소를 했다. 그러나 송시용은 박영관과 함께 출소했고, 조인현은 그 후 어찌 되었는지 기록이 전혀 없다. 만약 그가 예정대로 수감 형기를 마쳤더라면 1933년 10월에 출소했을 것이다. 박영관 역시 생전에 조인현의 소식이 몹시도 궁금했을 터인데, 그와 관련된 소식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지금 우리가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있어 주목된다. 1977~78년 무렵, 일본에서 낯선 편지 한 장이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로 배달되었다. 편지 의 수신인은 박영관의 장남 박춘회였다. 편지 발신인은 박춘회에게 동생이란 호칭을 썼으며, 박영관 에 대한 안부와 함께 나머지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박영관이 고인이 된 지 2~3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발신인은 박영관의 사망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낸 것이었다. 1970년대는 시대적으로 반공이 국시일 정도로 투철하던 때라, 가족들은 이 편지를 집에 두는 것 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이 편지를 들고 서울로 올라가 파출소에 신고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답 변은 전혀 없었고, 결과적으로 소중한 편지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편지 는 누가 보낸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조인현이 보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인현이 만약 형기를 마치지 못하고 형무소에서 사망했다면, 이는 반드시 기록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이 없다면 그는 어쨌든 만기로 출소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전북폭발탄 사건의 주범이자 연일 언론을 장식했던 그의 이름이 단 한번도 기사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 을 뜻할까. 3년 정도 지나면서 세상의 관심에서 잊혀져 그의 출소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다면, 그는 아마도 해외로 갔을 것이다. 혹 고향인 의주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만약 1970년대 일본에서 편지를 보내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 마도 조총련 계열의 인사가 되었을 것이다. 전북폭발탄사건은 사건 당시 일제 측이건 피의자였던 조직원 측이건, 양측 모두 보안과 기밀유지 차원에서 그 핵심 내용을 제대로 발설할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통의부 조직은 물론 이리동 척습격 계획과 관련되어 밝혀져야 할 내용이 너무도 많다. 앞장 말미에서 언급했던 대로, 1930년 9월~12월의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통의부와 관련된 인물들은 비단 최종 기소된 9인 만이 아니었 을 수도 있다. 1928년 6월 사건 발각 후 최초로 체포된 14인 중 한 사람이었던 원월봉을 비롯해서 전북 전주의 김일주⋅한종갑⋅이현석, 경남 밀양의 신현태⋅신현권 형제, 기타 전남 지역의 다수가 통의부와 모종의 연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