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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7월31일 목요일 12 (제223호) 기획 유촌박종남(1558-1620)선생은임진·정유양란(兩亂)에창의하여나라의어려움을극복하였음에도몸을낮추고논공 행상(論功行賞)에드러내지않은선비의 삶을살다간시대의거유(巨儒)이다.소학에“군자의행실은고요한마음으로몸을닦고검소한생활로덕을길러야한 다.마음이욕심없이담박하지않으면뜻 을밝힐수없고,마음이안정돼있지않으면원대한뜻을이룰수없다.”라는말이있다.마치선생의삶을두고하는말 같기도하다.선생은어렸을적‘맹자’를 읽다가물고기를버리고곰발바닥을취하는내용에이르러관련된글귀를뽑아벽위에븮장부가뜻을수립함에마땅히 이와같아야한다.븯라고적어그원대한 꿈은장성하여무예를익혀무과에급제하였으니문(文)과무(武)를겸비해병법에능하였으니명장이라아니할수없 다.난리가끝나자,관직에나아가기위해 서울에잠시있었지만벼슬길에서는늘머뭇거리면서구차히영합하려하지않았고,권귀들과가까이지내며부귀를 취하는것은더더욱좋아하지않아마침 내옷자락을떨치고고향으로돌아왔다.논어에서‘학문을충분히하고서여력이있으면벼슬을하라.’는이치를깨달 은바,고향으로돌아와앎을지극히하고 이치를궁구하는성리의학문에뜻을두어,몇칸의서실을짓고날마다여러서생들과경전에대해토의하고도의를강 구하고연마하면서집곁에버드나무를 심고‘유촌븯'이라자호하였으니,그뜻은도연명의아취로부터따온것으로선생이지은븮귀전시(歸田詩)븯는21세기위정 자들에게는큰교훈이될듯하다. 궁마(弓馬)익히던초심이잘못이었음을점차깨달아[弓初心漸覺,궁초심점각]전원깊은곳으로노래부르며돌아왔노라.[田園深處賦而歸,전원심처부이 귀]문앞에오류선생따라버들심었으니[門前學種先生柳,문전학종선생류]예전그사람처럼늙도록포의로지내리 라[依舊人間老布衣,의구인간로포의] <임진·정유양란(兩亂)큰공을세우고도드러내지않은小學君子> 선생의문학세계 선생의 이름(휘)는 종남(從 男), 자는 선술(善述)이다. 그 선조는 월성 출신으로 월성의 후손들은 경기 인천에 거주하 였는데, 선조 휘 덕옹(德雍)이 구례현감이 되었기에 이 지역 으로 와서 거주하니 이분이 바 로 선생의 5대조이시다. 현감 공이 승의랑인 휘 이문(以文) 을 낳으니 덕(德)을 숨기고 출 사하지 않았으며, 승의랑은 휘 형손(亨孫)을 낳으셨으니 이분 은 후릉참봉을 지내 셨다.참봉공은휘민수(敏樹)를낳으시니호가무계 (舞溪)이며,효행으로세상에이름났으니그효행을 소개해본다. 「성품이지극히효성스러워어려서부터부모를섬 기는도리를알았다.15살이되었을때모친이병으로 위독하자,울면서사방으로뛰어다니며약을구해달 여 드렸다.병이 조금 나아진 모친이 석이(石茸)버섯 을 먹고 싶어 하자 혼자 팔공산(八公山)에 들어가 캤 으나집과의거리가멀어돌아오는도중에해가저물 었는데큰호랑이가길을막고있었다.이에놀라울지 도 못하고 호랑이에게 “내가 모친이 병이 들어 약을 캐서돌아가는데,네가아무리무지렁이라 할지라도 나를해칠수있겠는가?”하자호랑이가머리를수그 리고조금피하더니길을끼고걷는것이마치호위하 는것과같더니집에도착하자사라졌다.모친의입맛 이점점돌아오자날마다석이버섯을캐왔으며이후 모친의병도깨끗하게나았다.」 무계공은 휘 응희(應禧)를 낳으니 천거로 선릉참 봉(宣陵參奉)을지냈다.참봉공은신천강씨사인수 의따님에게장가들어2남을두었는데,선생이바로 차남으로 가정 무오년 午年(1558) 음력 2월 14일에 경북군위군의흥면쌍정리의종가에서태어났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였으며 기국이 크기 로는짝될만한사람이없었다.나이가겨우13세인데 븮맹자븯를읽다가물고기를버리고곰발바닥을취하는 내용에이르러개연히벽에다음과같은글을썼다. 뷺장부가 뜻을 수립함에 마땅히 목숨을 버리고 의 리를선택하여추성(鄒聖,맹자)께부끄러움이없어 야 옳다.뷻 나이가조금더들자지향이더욱커지고기개가있 었으니,팔을걷어붙이고다음과같이탄식하였다.뷺남 아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응당 문무를 겸비해야지,어 찌 늙은 서생을 본받아 한갓 문필에만 종사하려 하겠 는가?뷻그리하여경전을연구하는틈틈이무예도두루 익혔다.부친인참봉공께서비록못하게하며나무라 기는하셨지만,속으로는기특하다고생각하셨다. 계유년(癸酉,1573)에부친상을당하였고,을해년(乙 亥, 1575)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앞뒤의 상례를 모 두예법대로집행하였다.양친께서돌아가신뒤로는비 록 과거시험에 연연해하지 않았으나 매번 븮시경븯을 읽 다가 뷺씩씩한 무사여, 공후의 간성이로다.[赳赳武夫, 公侯城]뷻라는구절에이르면여러번반복하여읊조리 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만력(萬曆)신묘년(辛 卯年,선조24,1591)에 별시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하여종9품전력부위에조용되었다.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왜구가 대거 쳐들어와 영남 일도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당시 선생은 마 침집에머무르고있다가비분을이기지못하고,“조 선의 200년 종사가 적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을 어 찌차마두고보겠는가!뷻라고하고는마침내집안사 당에고하고처자들을불러영원히이별하였다. 그리고 장사 37인을 모집하였는데 인근 고을에서 와서 따르는 자들이 거의 100여 명이었다. 이에 대오 를결성하고난을구하러달려갔다.당시학봉김성일 공이초유사로서여러고을에격문을돌려의병을모 집하였는데 자신도 모르게의기를백배로 더내었다. 특히망우당곽재우선생께서의령에서의병을창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자신이 모은 병사들과 함께진중으로나아가곽선생을뵈니,선생이대단히 감탄하고 칭찬하였으며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래 전 부터알던친구처럼여겨모든권한과작전을함께상 의하였다.마침내두분이함께정호와세간두지역에 진을치고,서로치달리고머무르며협력하였으니,한 편으로는 창원과 웅천의 왜적들이 함안으로 출몰하 는것을막고,다른한편으로영산과창녕을방어하여 낙동강에들끓던적을막았다.혹공격하고혹추격하 기도 하니 왜적들이 감히 방자하게 충돌하지 못하였 고백성들은그에힘입어농사를지을수있었다. 당시초유사김성일선생께서진양(晉陽,진주)이 위급하다는소식을듣고유성처럼급히단성으로가 서 함양과 산음 등의 여러 군사를 동원하여 진주로 달려갔다. 부군은 곽 선생을 따라 먼저 성에 들어가 있었기에군대의위세가자못왕성하였으므로,왜적 들이 촉석루(矗石樓)아래까지 와서는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여 러 의병과 함께 김 선생이 전투를 독려하니 군세를 합하여적을추격하였다.그러자왜적들이낭패하여 숨어들었다. 이 전투에 힘입어 진양이 온전히 보호 될 수 있었으니 초유사께서 크게 칭찬하고 상을 내 렸다. 계사년(癸巳, 1593) 특별히 어모장군(禦侮將 軍) 용양위(龍 웹 衛)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다 가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겨졌으나 모두 군사 를거느리고있다는이유로사양하고나아가지않았 다.전후로 사로잡은 포로의 수급을 한 번도(그 자신 이 직접)바치지 않았으며 논공행상을 할 때도 겸손 하게 처신하여 마치 공이 하나도 없는 듯이 하였으 니,곽선생이늘그아량을칭송하였다. 정유년(1597)가을,왜구들이재차침범하였다.부군 은 다시 곽 선생을 따라 밀양,영산,창녕,현풍 등지의 의병을통솔하여창녕의화왕산성으로옮겨수비하였 다. 안에서는 작전을 지시하고, 밖에서는 적의 예봉과 살촉을방어해내니군령은더욱엄격해졌고민심은더 욱 가다듬어졌다.또한 적들은 멀리서 군진이 잘 정돈 되어있음을보고감히범하지못한채달아나니,강우 (경상남도)일대가적들이쳐들어오는근심을면할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성을 잘 수비한 덕분이었다. 왜적들을 평정하고 난 뒤, 선생은 부름을 받고 서 울로 들어가 행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제수되 었고 인하여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하였으 니 모두 특별한 은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 는 붕당의 모의가 날마다 변하고 있었다. 부군은 마 침내그러한상황에서벼슬하는것을달가워하지않 아, 완평 이원익상공을 찾아뵙고는 준비 해간 진퇴 의 의리에 대해 진달한 뒤 결단을 내려 귀향하였다. 그리고는갑자기환하게깨달아이렇게말했다. ‘논어에서학문을충분히하고서여력이있으면벼슬 을하라.’고하였으니,내가그동안업으로삼은것이어 찌고인들께부끄러움이없겠는가?이에마음을바로잡 고 이치를 궁구하는 성리의 학문에 뜻을 두어,선 부군 (아버지)의 인지정(仁智亭)을 중수하는 한편 성경와 (誠敬窩)라는서실을짓고날마다여러서생들과도의 를강구하고연마하였다.그의학문은사서(四書)에연 원을두고있는데,특히븮중용븯에더욱정밀하여태극도 상(太極圖象)의 관건(關鍵)과 천지만물의 형태 등에 대해서도자세히해석하지않은것이없었다.항상개과 천선(改過遷善)을 학문하는 제1의(義)로 삼았으니,평 소한가하게계실때라하더라도잠시도마음내키는대 로하지않았으며,더욱절실히경계하고반성하였다. 선생은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으니, 상 례를치를 때는슬픔을 지극히 하고,제사를 받들때 는정성을다하였다.그리고는늘,뷺세상사람들은대 부 분 인정과 도리에 박하지만,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예(禮)라는 것은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 니, 설혹 고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인정과 천리에 맞기만 한다면 가벼운 것을 버리고 후한 법을 따르 는것이왜안될일이겠는가?뷻라고하였다. 자녀들을 은혜로써 양육하고,비복들을 관대하게 다스렸기에일찍이사나운기색이나꾸짖는듯한말 소리가 없으셨다. 그저 조용히 자질들을 가르치시 길, “가정의 도란 모름지기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지 극히 하는 것이니 이를 어기지 말라.또한 종족의 친 척들가운데가난하고병든자가있으면힘닿는대로 최선을다해구제해주어야한다.무릇어려운사람을 구제하고궁핍한사람을구휼하는의리는설령서로 모르는 사이라 할지라도 옛사람들이 실천한 것이다. 하물며 종족 간의 정의란 미칠 수 있고 할 만한 힘이 있는 사이인데도 서로 어려움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의 도(道)라고 할 수 있겠는가? 책 을 읽을 때는 븮소학븯의 븮경신편(敬身篇)븯을 초학자가 덕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아야 하고, 사서를 일신의 표준으로삼아야하니,마음을가라앉히고그내용을 음미하며,정밀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분별하여 한 글자도그냥지나쳐서는안된다.”라고하였다. 선생은인재최현,오봉신지제두선생과도의로교 유하였다. 또한 도연명의 그윽한 취미를 사모하여 집 주변에 버드나무 대여섯 그루를 심은 것을 계기로 븮유 촌븯이라 자호하고는 그 아래에서 소요하였다.몸소 낚 시질하고산나물을캐며유유자적하게지냈으니,다시 는 세상일에 뜻 을 두지 않을 듯하였다. 그러나 때로 국 사(國事)에대해이야기할경우,충의로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 천성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광해 기유년(己酉, 1609)에 경상좌도병마 우후(慶尙左道兵馬虞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신해년(1611)에는가선대부(嘉善大夫)의품계 로승진하고,인하여평안도병마순무사(平安道兵馬巡 撫使)에제배되었으나병을핑계로사양하였다. 갑인년(1614), 광해군이 아우인 영창대군 이의를 살해하였다.이로부터선생은시름에잠겨마음이즐 겁지 않아 하였는데, 급기야 무오년戊午(1618)에 인 목대비가 서궁으로 폐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근 심과 통분으로 인한 질병이 생겼다.결국,경신년(庚 申, 1620) 음력 8월 초2일에 정침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 63세이다. 임종 때 묘표에 븮선전관(宣傳官)븯이 라고 적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니, 이는 선생의 은미한 뜻이다. 같은 해 10월 15 일, 국통산 오향(午 向)의언덕에장사지냈다. 선생은 구산박씨(龜山朴氏) 호가 명계(明溪)이 신생원박전(朴全)의따님에게장가들어3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흔, 차남은 칭, 삼남은 현이고, 딸 은사인이집에게출가하였다.부인께서는자상하고 인자하시어,시부모를섬김에정성을다하였고동서 들을 대할 때에는 애정을 다 하였다. 이웃을 후대하 고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노비라 할지라도 어루만져보살피며집안형편을따지지않고베푸는 것을 아끼지 않았 다. 계해년(癸亥,1623) 정월 23일 에별세하여선고의묘에합장되었다. 【이행록은당초불에타일실되었으나,훗날묵재 공 ( 默 齋 公 : 朴 의 호)의 난고에서 찾아내어 김제 산(金霽山:김성탁)의 행장뒤에수록한것으로통훈대 부행홍문관수찬팔계정홍경이지은것을인용하였다.】 븮유촌선생문 집븯 권1-3까지 는 박종남의 시 문을, 권4에는 그에 대한 만시 (輓詩), 뇌사, 제문, 서원 봉 안문 등이 부록 으로 편차하였다. 권1에는 모두 58제(題)의 시가 실 려 있는데,창작 순서대로 편차되어 있지는 않다.내 용상 주로 정계 은퇴 이후부터 만년에 지은 작품들 이다. 초년의 원대한 지향을 이루지 못함을 성찰하 는 내용, 의흥 일대의 명승지를 탐방하며 자신이 몸 담아 살아가는 고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내용, 조부와부친의충효에대한계승의지를드러내는내 용,최현븡서애유성룡.의병장출신인성재금난수,한 강 정구, 여헌 장현광 등 지역 내 명망 있는 학자들과 교유한내용등이다.형식상율시보다는절구에장처 가 있으며,특히 븮귀래가(歸來歌)븯,븮은거를 노래하다 [幽居吟]븯 등의 장편고시 및 븮전원에서의 노래(田園 吟)븯와 같은 작품은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대한경모를잘보여주고있다.븮황마탄(黃馬歎)븯과같 은작품은광해조대의혼탁한정국에대한비분강개함 을드러내고있기도하다. 권2에는1장에서 언급한븮올리지못한 소(擬上疏) 븯와서신 등의산문이실려있다.이상소는1618년에 지었으며상소특유의어려운투식을사용하지않고 도븮맹자븯,븮주역븯,븮서경븯,븮소학븯등의경전을적재적소 에 전고로 활용하여 신하된 자의 충심을 절제된 형 식으로 드러낸 명문이다. 븮체찰사 이상국께 답하다 [答體察使李相國]븯에서는최현,신지제등과의토의 내용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 8조목의 전략을 진언하 고있어주목된다.븮망우당곽공께올리다븯라는제목 의두편의편지에서는분기탱천한곽재우에게자중 자애 할 것을 진언하며 병장기를 수선하고 대오를 정비한뒤에정진의군진으로달려갈것을추천하거 나, 정유재란이 종식된 뒤 곽재우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벽곡술을배우며은거하자이를신중히생각 할 것을 권유하는 등 박종남의 원대한 안목과 진중 한 성품이 드러난다. 또한 「신순부께 드리는 답장 [答申順夫]」에서는븮예기븯,븮주자가례븯,븮대당개원례븯 등 상제례에 대해,븮최계승(崔季昇,최현)븯께 보내는 답장에서는 븮경(敬)븯 공부법에 대해 해박함을 잘 보 여주고있다.잡저(雜著)에는븮태극론太極論븯,븮만물 의 생성에 대한 논 [萬物生成論]븯 등 성리학에 잠심 한 결과와 천지만물과 세계에 대한 거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 대폭 실려 있다. 그밖에도 그밖에 흔(倧), 칭( )등 자제들을 가르치는 내용과 지역 의 후학들을 위해 수립한 「서당학규書堂學規」등의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형식상, 선생은 당송고문보 다는 주희를 위시한 송대 유자들의 이학서에 깊이 경도되어있음을알수있다. 권3에는 1장에서 언급한 53조목의 븮중용븯 독서차 의[讀中庸箚疑]」, 의흥의 선암산 등을 유람한 기록 등서발(序跋)과기문(記文),잠명(箴銘)등이실려 있다.특히 븮영모재 중건기(永慕齋重建記)븯,븮인지정 중수기(仁智亭重修記)븯, 조부 무계부군의 븮여묘록 (廬墓錄)븯 뒤에 붙이다(王考舞溪廬墓錄後),조부무 계부군의가장(王考舞溪府君家狀)]등의작품은조 부 박민수와 부친 박응희의 숨겨진 효행과 독실한 실천을 글로 남겨 후손들에게 징험할 자료를 남기 려는 의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도 그러한 선친 들의뜻을계승할것을다짐하는명문이다.븮하도낙 서찬(河圖洛書贊)븯과 븮명덕찬(明德贊)븯은 태극이나 상수(象數)에대한풀이를보여주고있다. 권4의 부록은 묘도문자 등을 모은 것인데,앞서 언 급한최현의뇌사,신지제의제문외에영남지역의명 망 있는 유자들이 지은 만시(輓詩) 등이 함께 실려 있 다.만시의작자가운데신익성(申翊聖)등구연이있 는분도있으며,최현의아들인최산휘,곽재우의아들 인곽형등대를잇는교분을보여주는분들도있다. 선생의 시문은 여러 차례의 병란과 화재 등으로 인해대부분일실되었으며,곽재우,최현,신지제등 의 문집에도 박종남과 교유한 작품 등이 제대로 전 해지지않아그문학세계의전모를유추하지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지만 그의 문학은 결코 무인 출 신의 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담 박한풍격과고결한지향을드러내고있다고평가된 다.이에 정홍경은 묘갈명에서 그를 븮무관 차림의 군 자 ( 靺 君子)븯라는표현으로정의하였으니,이는 그의 생애와 행적, 문학세계를 통관하는 주요 키워 드라 할만하다. 또한 의흥 출신의 인재로서 지역의 후학들에게 깊은 귀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부심 의 원천이기도 하였다는 점이 권4의 부록에 실린 여 러작품들을통해증명된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서 내린 벼슬 역시 끝 내 마다한 채 덕 을 숨기고 은 거하면서후학을양성하고동지들과도의를강마하 며 생을 마감하였다.박종남이 살아간 16-17세기는 비록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기는 하였으나, '목 릉성세(穆陵盛世, 선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 리학과 문운이 융성하여 걸출한 인재들이 대거 배 출된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온몸으 로대응하며 자신이배운바를 실천하고,또한과장 없이담박하고진솔하면서도겸손한자세로자신의 견문과 느낌을 글로 표출한 박 종남과 같은 존재는 그 빛이 가려 지기 십상이다. 븮난중사적븯과 같은 글 에서도 박종남의 성명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국역유촌선생문집』을통해박종남과같은인재가 곽재우, 김성일 등을 보좌하며 자신의 장처가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음을 징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구슬아 著 국역 ‘유촌 문집’해제에서옮김) 유촌 선생은 소학군자로 선비로서의 책임과 의무 를 다했음을 알 수 있다.국란을 당해서는 분연히 일 어나화왕산성을온전히보전하신업적을자신의공 으로여기지않았고,인목대비가서궁으로폐출되었 다는소식을듣고는근심과통분으로인한질병이생 겼다.물러날때를알아어지러운세상에발을들여놓 지 않는 현명한 처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이될만하다.조부와부모의충효정신에서비롯 된충효사상또한우러러보인다.대개충효란본성에 서부터비롯되는데이본성이라는것은오직의리로 서내면을수양한후에야비로소무궁하게발양할수 있는것이다.명리를과감하게버리고편안히은거하 며그저경학에만마음을쏟았으니선생의충의정신 과 의로운 기운, 그리고 아름다운 자품은 가학과 하 늘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면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선생의후손들은선양사업을위해많은노력 을할수있음을알수있다.2023년선생의문집을국 역으로출간함으로서더욱더세상에빛이나고있어 유지를받들고있는후손들에게찬사를보낸다. /자료제공박원이前일성왕릉참봉(제21대) 유촌박종남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유촌선생후예집성촌-대구광역시군위군우보면나호3리(윗나부리) 유촌선생의齋舍경의재(敬義齋).대구광역시군위군우보면나호3리(윗나불길17) 유촌선생유허비.나호3 리마을앞당산에있어많은길손들이찾고있다. 선생의묘비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