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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6월30일 월요일 12 (제222호) 기획 무민당박인선생은위기지학(爲己之學)을실천해온대표적인문인이자학자이다.위기지학을함으로써자신의본 마음을밝혀그것을실천하는 이상적삶은그를성인(聖人)으로추앙한다.10세때국인위왜왜첨다(國人爲倭倭添多,왜구의침입으로항복하는자 가많으니나라사람이왜놈이 되어왜놈이점점많아진다)는시를지었고,선조,광해,인조시대당파에희생된많은선비를보면서과거에급제하여 이루수있는출세의길을단 념하고'벼슬을쫓아20년세월을부질없이보냈음'을개탄하여,스스로號(호)를臨軒(임헌)이라하였고.오직학문에만 몰두하면서향약(鄕約)과계 (契)를설립하여향촌의계율에도힘쓰는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길을택하였다.병자호란때 는의병도모집하였으나,인조 가강화(항복)하였음을듣고堂號(당호)를無悶(무민)이라고치고門을絶戶(절호)라하고왕세자가심양으로볼모로 가있을때는두견시를지어 그회포를하소연함은선생의강인한절의와우국충정을짐작케하며,단순히향촌에은거하여글읽고강론하는선비 가아닌면모를볼수있다. 후학양성을위해지은용연재(龍淵齋),영모재(永慕齋)그리고후학과문인들이건립한용연서원(龍淵書院)등의소 실과서원철폐령으로오늘에 볼수없음이애석하지만지금까지굳건히유지되고있는碧亭(벽한정)은그자체가우리후손들은물론향민과많은 사람들의흠모의대상으로19 96년3월11일경상남도문화재자료(慶尙南道文化財資料)제233호로지정되어오늘에이르고있다. 선생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고양대군(휘 언 성)은 경명왕의 아드님으로 경상북도 고령(당시 고 양)을 식읍으로 봉군되었고 수성시조이다. 시조(始 祖)에 이어지는 계대(系代)와 소목(昭穆)이 분명하 지 못하여 상계(上系)에서 호장공파(戶長公派)와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그리고 주부공파(主簿公 派)등3파로나뉘어각기고려에서명문거족으로면 목을 세웠다. 부창정은 고려시대 지방 행정구역 단 위인 주현(州縣)의 재무(財務)에 관한 일을 맡아보 았던 향직(鄕職)이었다.부창정공 휘 환(還)의 아들 동신(東臣)은 찰리사(察里使)이고, 손자 세영(世 英)은 금오위동정(金吾衛同正)이며 증손은 인걸 (仁傑)과인비(仁庇)이니함께상장군(上將軍)이시 고 현손은 수견(守堅)으로 찬성사(贊成事)이시며 문발(文拔)은별장(別將)이다오대손(五代孫)광순 (光純)이 보조공신(輔助功臣)으로 찬성사이며 고 양부원군(高陽府院君)이고 광우(光佑)는 문하시중 (門下侍中)이니 역시 고양부원군이며 정(貞)은 군 기감정(軍器監正)이다.육대손(六代孫)우생(雨生) 이 상호군(上護軍)에 올라 순충양절동덕찬화공신 (純忠亮節同德贊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삼중대 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 典理司事)를 지냈다. 대를 이어 고양부원군(高陽府 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7대순 임귀(林貴)는 봉 익대부(奉翊大夫)사재시(司宰寺)판사(判事)를지 냈다. 8대손 간(簡)은 서령(署令)을 지내다가 여말 (麗末)에 은퇴(隱退)하여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桃 津里)에 일시은거하였다.공은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 중의 한 분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청주인(淸州人)한철충(韓哲沖),중랑장(中郞 將)광산인(光山人)김유(金維),고령인(高靈人)박 경(朴景), 박용수(朴龍壽) 형제 등과 고려 유신(遺 臣)으로서 조선왕조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절개 를 지키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종유(從 遊)하였다.말년에합천으로이거하였다. 9대손문형(文亨)은사정(司正)의관직을제수받 았다.사정(司正)이란관직은고려시대2군6위(二軍 六衛)의 무관직인 별장(別將)이 조선 건국 초까지 이어오다가,태조4년(1395년)에사정(司正)으로개 칭되었다. 사정공파(司正公派) 파조(派祖)이다. 사 정공의 아들 춘산(春山, 10대손)은 세조 1년(1455 년) 진용부위(進勇副尉)로서 계유정난(癸酉靖亂) 에세조가왕위에오르는데공이있어좌익원종공신 (佐翼願從功臣)3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세조 13년 (1467년) 건주위(建州衛)를 정벌(征伐)한 군공(軍 功)으로1자급(資級)을올려받았으며조선시대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보좌하는 외관직 (外官職) 종3품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제수(除授) 받았다.손자윤빈(允斌,11대손)의초휘(初諱)는하 산(夏山)이고 호는 만취헌(晩就軒)이다. 백형 박춘 산(朴春山)과 함께 좌익원종공신(佐翼願從功臣) 3 등에 녹훈(錄勳)되었다. 학문은 정밀하고 깊었으며 뛰어났고 효도와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으며 말이 나글로자기의생각을발표하는것이충실(充實)하 고 올발라 사가정(四佳亭)서거정(徐居正)이 “동량 지재(棟梁之材) 공보지기(公輔之器), 나라의 중임 을 맡을 만한 큰 인재(人材)이며 재상의 직임 맡을 그릇이다”라고 격찬(激讚)하였으며 문음(門蔭)으 로의정부(議政府)사록(司錄)으로천거(薦擧)되었 으며 그 후 통훈대부(通訓大夫) 신령현감(新寧縣 監)으로 재임 중 백성을 다스림에 청렴하고 결백하 였으니 고을이 태평(太平)하였다. 무민당의 5대조 이다. 증조부 순신(舜臣)은 군자감주부, 조부 충로(忠老) 는일찍별세하였고,종조부상로(祥老)는임라창의장 이며, 아버지 휘 수종(壽宗)은 용사의 란(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의진에 참여한 창의장이며 선조 36년(1603) 생원시3등(三等)25위(55/100)로합격한성균생원이다. 박인(朴絪)선생은임진왜란에창의한창의장으 로 성균생원인 휘 수종(壽宗)과 어머니 서산정씨와 의사이에서선조16년1583년12월6일現합천군야 로면하림리외가에서출생하였다.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재종조모 형씨(邢氏)의 지극한정성으로자라품성이정미하고영특하여성 인의 거동이었으며 7세에 글을 배워 10세에 글을 짓 는 비범한 재주를 가졌으며,외종숙 래임 정인홍(來 庵鄭仁弘)선생의 문하에 입문하여 고고탁절 한 기 상과경의지학의요체를탐구하였다. 선조 35년 1602년 20세 때 공조판서 순천인(順天 人)박이순(임란의병장)의따님과결혼하여 선조37 년 1604년 22세 때 향시에 4차례나 합격하였으나 벼 슬을 마다하고 순수 학문의 길에 매진하였다. 이후 로 부모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는 했으나 급제에 마 음을두지않고오로지학문정진에뜻을두었다. 25세때겨울에용강(龍岡)촌에살면서서실을잠 실(潛室)이라이름하였다.이때무민당은새벽에일 어나서는부모님께문안하고물러나와잠실에거처 하였으며,해 가저물도록꿇어 앉아글을 읽고침잠 하였다.용강촌은현재용주면손목리라고한다. 27세 때 봄에 향시에 또 합격했다. 이때 무민당이 과거에 응시한 것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 만 남명 선생의 뷺티끌 흙이 뱃속에 있으면, 지금 곧 배를 갈 라 흐르는 물에 씻으리라”는 욕천시 구절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부친에게 과거를 폐하기를 청하였다. 부친이 허락하여 비로소 과거 공부를 그 만두고학문에전념할수있었다. 28세때는임헌(臨軒)이라고字號를정했다.이號 는븮주역臨卦(임괘)븯에“대개군자가남들을가르치 는 생각은 무궁하여 백성을 보존함이 끝이 없다.”는 뜻에서취한것이다. 광해군 3년 1611년 29세 때 향약 8조를 지어 지역 민을 순화(純化)하고 인재육성에 매진하였고, 광해 군5년1613년31세에기축옥사(己丑獄事)때정인홍 선생께 신구하는 주청을 올릴 것을 품시, 정인홍 선 생은사직소를내고부임하지않음. 30세때가을에덕천에가서남명선생사우(祠宇) 와 묘소를 배알하고 두류산에서 놀았다. 이듬해 당 시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이이첨 일파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한다는 것 을듣고내암정인홍에게편지를보내어불가함을주 장했다.무민당과내암은외척관계로같은고향출신 이며, 무민당이 일찍이 그의 문하에 출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어지러운 정국에 바른 말을 하다 가 결 국귀양을가게되는동계정온,한사강대수등어진 선비들과도친분이있어이들을위해변호하기도했 다. 인조 원년 1623년 41세 때 서인의 반란으로 내암 정인홍 선생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자 무민당 께서는 전일 있었던 스승에 대한 시비를 말하지 아니하고 " 지난날생각이달랐다고해서지나간허물을비판하 겠는가. 국법이 이미 정해졌는데 좇아서 미워하면 군자가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겨울에는 진주 고산정사(孤 山精舍)에 가서 정훤, 하홍도등과학문을토론했다. 한편선생은내암정인홍선생이처형당하자정염 과 함께 시신을 걷어 매장하는 스승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하였다. 인조 6년 1628년46세 때 남명 조식의 아들 조차마 로부터 남명선생 연보(南冥先生年譜)와 사우록(師 友錄) 편찬을 위촉받아 편찬한 연유로 벽한정이 남 명학의발원지라불린다. 인조7년 1629년 47세 벽연재를 낙성,사옹원 참봉 에 재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인조 9년 1631 년49세때수암류진(서애류성용의아들)이합천군 수로 부임하여 11년 동안 재임 하면서 서애집 간행 추진과선생을찾아와도의지교를맺었다. 인조10년 1632년 50세 때 창릉참봉에 제수되었 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인조 11년 1633년 51세 때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전기 자료인 산해사우연 원록 편찬에 착수(정동계가 용암서원 원장으로 취 임) 인조 14년 1636년 54세 때 산해사우연원록 탈 고하였다. 그 후에도 수정 작업이 계속되어, 훗날 간행에 이르기까지는 무민당 사후에 경상우도 유림의 동 향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때 많은 서책을 본 무민당은 안질에다가 8~9년 전부터 산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병세는 더욱 심각하여 작업에 커다 란 지장을 주었으며, 출입 에도 부자유스러웠고 4년 뒤 세상을 떠나는 원인 이 되 었 다 . 55세 때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는 삼전도의 국치를 당하자거처하는곳의이름을무민당(悶堂)이라고고 치고문을절호문(節戶門)이라고하였다.무민당이라 는말은정묘·병자호란끝에정월에인조가삼전도에 서청태종에게항복하였다는소식을듣고고쳤고'대 개나가지아니하면허물이없다'는뜻에서취한것이 다. 인조17년1639년57세봄벽한정을낙성하고가을 에 심양에 인질로 가있는 세자에게 보내는 회포를 읊은두견시를지었으며,이듬해인조18년1640년 5 8세11월10일학포정선생의고산정사(진양군대평 리)에서 58세를 일기로 고종하여 효종 10년 1658년 사림에서 유덕을 그려 용연서원을 창건하여 배향하 였다. 벽한정은 남명학의 발원지이다. 인조17년 1639년 에건립하여수많은후학을배출시켰으며특히남명 선생의 사상을 숭앙하여 남명연보, 언행록, 산해사 우연원록 집필 소장 하였으며 무민당 문집과 함께 목판에새겨보관되어있는문화유적의고가로1996 년3월11일자로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233호로 지 정되었고,소장하고있는무민당집,영모록.책판152 매는 2008년 1월 10일 경상남도유형문화제 제470호 로지정되었다. (벽한정)은후학(後學)을양성하고문인(門人)과 향촌의 강학당(講學堂당)으로서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저서인남명년보(南冥年譜),언행록(言行 錄),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綠)과 무민당집 (无悶堂集) 등 수 많은 덕망 있는 이들의 문집(文集) 서책(書冊)목판(木板)등이소장되어있는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 집으로 좌측과 정면 전체에 마루를 깔았고 전면에 계자난간을둘렀다. 십리 백사장과 벚꽃 길을 배경으로 삼수(三水)가 합쳐지는 황강변에 위치하여 주변 송림과 황강의 조 화로운아름다운경관속에그자태가더욱빛이난다. 가) 개관 : 정조 22년(1790) 정월에 입재(立齋) 정 종로(鄭宗魯)가 찬술한 서문과 갑술년(1814) 7월에 무민당의 5대손 박성림(朴聖林)이 찬술한 발문이 있는것으로보아1790년무렵부터간행을위한준비 를 하여 1814년 무렵에 책판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 다. 이 책판은 모두 279장 140매로, 별집 1븡2장 1매를 제외하고 모두 보존되어 있으며,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정도로훼손된것이4장이다. 대체적인 크기는 가로 52.5cm, 세로 27cm, 두께 2cm이며, 광곽의 크기는 가로 32.5cm, 세로 20cm 이다. 나) 무민당의 생애와 위인 : 무민당 박인은 합천 야로 외가에서 태어나 내종숙(內從叔) 내암 정인 홍(鄭仁弘)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평생 고거(故 居)조동(釣洞)에칩거하면서,인조반정이후동계 정온 및 겸재 하홍도와 함께 남명학파의 리더로서 학파를 내부적으로결집케 하고,남명 조식의사우 연원록과연보작성을주도했던인물이다. 다)무민당선생문집의주요내용:무민당선생문 집은원집이7권4책이고별집이2권1책이어서,모 두9권5책으로되어있다. 원집의 목록 앞에 서문과 세계븡연보가 차례로 들 어있고,1권에는시(詩),2븡3권에는서(書),4권에는 서븡기븡설븡잡저븡제문븡묘갈, 5권에는 남명선생언행총 록븡남명선생연보, 6븡7권에는 부록으로 만장븡제문븡 행장븡묘갈븡묘지븡용연서원상량문븡상향축문 등이 들 어있다. 별집 1권에는 제영븡행록븡소가 들어 있고, 2권에 는 사우록과 책 전체의 발문이 들어 있다. 이 가운 데 남명선생언행총록과 남명선생연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 내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한가를 대 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상가정서(上家庭 書)는 출처관에 대한 표현이나 과거를 보는 관점 등이 내암 정인홍의 작품 문답(問答)과 흡사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가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학문 태도에 얼마나 깊이 유염되었는가 하는 점을 알게한다. 벽한정이 있는 경남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2구는 35가구50명이살고있다.이곳은부창정(副倉正)환 (還)의9세손인서령(署令)간簡)선조가고려말조 상 누대로 입은 고려 왕조의 은의가 태산 같아 조선 왕조의 신하 노릇을 거부하고 은퇴하여 판서(判書) 를 지낸 한철중, 영중랑(領中郞) 김유, 사관(官) 권 공 등과 함께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고령박씨 집성 촌)에서 절개를 지키며 도의를 강마하고 종유하다 가 말년에 현재 합천인 갓골에 이거하여 자리 잡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 다. 그 후 약 1km떨어진 조동으로 1914년 차츰차츰 이사하여 120년 동안 사정공파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고령박씨집성촌이되었다.옛지명인종갈골봉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작은 봉우리들이 7개가 내리 있어 서 칠봉산이라고 하고 맨 아래쪽 두 봉우리 사이에 벽한정이 있고,벽한정 앞에 보이는 봉을 앞산,뒤에 있는 봉을 뒷산이라 한다. 조동은 이 봉우리의 자락 에 위치하고 있다. 고령박씨가 집성촌으로 살고 있 는 이곳의 옛 지명은 합천 이사현 이사리이다. 이사 리라고하면고령박씨라는접미어가따라붙을정도 로유서가깊은고령박씨의집성촌이다. 이사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뒤쪽 황둔강을 이수, 황계천을 사수라 하며 이 두개의 강이 이사리에서 만났다고하여이사리라지었다고한다.1914년조동 (고령박씨 집성촌), 성산(고령박씨 집성촌), 손목 (광산김씨 집성촌),상월,하원,관음,아방,두곡,연 촌, 중방, 정산, 화곡이 이사역면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지금으로부터약120년 전경신년대홍수로독 산제방이터져몇개의동네가폐촌이되었다. 손목이란동네이름의유래는합천에서용주면방 향으로 오다 보면 대넘어 고개라는 작은 고개에서 보면 마을이 손 방향에 있다고 하여 손목이라 지었 다고 한다. 대넘어 고개의 유래를 보면 고령박씨의 권세가 대단하여 다른 성씨네가 벼슬하여 대나무에 깃발을꽂고오다가고령박씨동네가보이는대넘어 고개에서는 감히 깃대를 들고 지나갈 수가 없어 깃 대를 내렸다고 하여 대넘어 고개라 하는데, 지금도 지명그대로쓰고있다. 실제박씨가살고있는동네를속칭조동(洞)이라 한다. 조동에는 소나무 노송이 둘러싸인 앞산과 뒷 산동산2개가있고그옆으로황둔강과황계천두강 이 흐르고 마을 앞에는 늪이 있어 동네가 고기를 낚 는 형국이라 조동이라 하였다고 전 해진다.(지금은 그 많은 늪이 합천댐을 조성하는 바람에 전부 논밭 이되고일부만늪으로남아있다.) 벽한정옆에는지금까지도조대가남아있다.속칭 조동인 이사리는 아직도 사정 공파 후손이 자리 잡 고있는벽한정문중으로고양대군21세손성균생원 (生員) 임란창의 장이신 조계공(釣溪公) 박수종의 자(子)무민당(悶堂)박인(朴)선생께서, 57세 때 16 39 년 벽한정을 건립하며 수많은 후학을 배출시켰 다. 무민당선생이작고한후후학들이선생을기리자 는뜻을모아벽한정옆에용연사(龍淵祠)를건립하 여 지금까지도 성균생원 조계공(成均生員 釣溪公), 징사 무민 당선생(悶堂先生),처사 우촌공(處 愚村 公)세분을모셔놓고봄,가을1년에두번씩(음력3 월3일,9월9일)아침에제사를올린다.음력설때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일가 어른들이 벽한정에 모여 숙식을 같이 하며 종사에 대한 의논도 하고 타향에 살다가고향에온일가들과세상살아가는이야기와 안부들, 수많은 담소를 나누고 밤에도 그곳에서 자 고 아침에 자녀들한테 세배를 받는다. 고향에 온 젊 은자녀들이밤에어른들이계시는벽한정에찾아와 인사를하고함께식사라도하라며성심성의껏금일 봉을 내어놓고 가면 그 돈으로 어른들은 외식도 같 이 한다. 여기서 벽한정에서 내려오는 전통 세배문화를 하 나소개하자면설날아침6시부터7시30분까지자녀 들이 세배하러 벽한정에 온다.청년에서부터 5살 된 손자까지 함께 와서 연세가 많은 어른들이 계시는 처음 방부터 세배를 하는데 그 방에 부친이나 삼촌 이계시면밖에서절을한번하고,방안에들어가한 번 더 절을 한다.밖에서 하는 절은 부친이나 삼촌께 하는 세배인사이고, 안에서 하는 절은 일가 어른들 께 세배인사 하는 것이다.두 번째 방에서도 세배 방 법은똑같다. 한 가정도 빠짐없이 왔는지 살피고 인사하러 다 왔다고 생각되면, 숙식을 같이 하고 계시던 어른들 도 서로에게 세배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제사준비를 하는 동안 여자 자녀,꼬 맹이손자녀에게절을받고세뱃돈도준다. 생각해보면 변화하는 현대 문명사회에 힘들고 복 잡한새해의세배문화를아직도고수하고있느냐며 반문하겠지만,이는조상대대로내려오는전통문화 이기 때문인데 이것도 앞으로 는 점점 사라져 간다 고생각하면후대에선조들은이렇게도하였구나하 는느낌도있을것으로사료된다. /자료제공박문호고령박씨사정공파종친회장 무민당박인선생과벽한정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가계(家系) 벽한정과용연서원전경,경남합천군용주면손목리3길94. 선생의생애 산해사우연원록(경상대학교도서관 소장). 무민당 박인 선 생이 조식 제자를 기록한 책이다. 박인은 내종숙 내암 정인 홍의문하에서수학한뒤평생합천에칩거하면서, 인조집 권 이후 동계 정온, 겸재 하홍도와 함께 남명학파의 리더로 서 학파를 내부적으로 결집케 하고, 남명 조식의 사우 연원 과연보작성을주도했다. [벽한정碧寒亭] [무민당선생문집책판] 무민당선생문집목판(152장)은경남유형문화재제470호로 지정합천박물관에소장되어있다. 고령박씨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