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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2025년 6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에는 조선총독 하세가와와 조선 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 太郞, 1861~1922]가 있었다. 하 세가와로부터 “가능한 모든 병력 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 령을 받은 우쓰노미야는 “부득이 할 경우 총기를 사용해도 된다” 는 등 10개 시행 항목을 하달하였 다. 이에 따라 잔인한 진압이 자 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쓰노미 야는 규슈 사가현(佐賀縣) 출신으 로 1890년 육군대학 졸업, 1894 년 청일전쟁 때는 대본영 육군 참 모, 1905년 러일전쟁 때는 육군 대좌로 참모본부 근무 등의 요직 을 거쳤다. 1918년 7월 조선주둔 일본군인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 임하여 1920년 8월까지 재직하였 다. 3 · 1독립운동으로 총독은 경질 되었으나, 조선군사령관은 그 직 위에서 새 총독 인 사이토를 맞이 하여 무단정치에 서 문화정치로의 군사적 기반을 받 쳐준 인물이었다. 다라서 3 · 1독립 운동으로 겉으로 는 문화정치를 표 방하였으나, 실질 적인 무단정치의 기본은 바뀌지 않 았던 것을 알 수 가 있다. 우쓰노 미야는 3 · 1운동 탄압 등의 공을 인정받아 그 해 11월 육군대장으 로 진급하고 이듬 해 8월 육군 군사 참의관으로 전직하였다가, 1922 년 2월 14일 위병으로 사망한 인 물이다. 특히 우쓰노미야는 자신의 일 기에서 제암리사건을 축소 은폐 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의 일기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이와나 미, 2007)에 수록된 내용은 다음 과 같다. ➍ ➎ ➌ ➌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 사령관(『일본 육군과 아시아정책』1, 2007) ➍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의 제암리 · 고 주리 학살만행 전시 부분 ➎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발간한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 『일본육군과 아 시아정책』1 · 2 · 3(장세윤 제공). 제암리 학살 만행의 은폐 회의기록이 실려있다. 우쓰노미야는 3·1운동 이후 북간도 지역 에 근거를 둔 독립군을 토벌하다가 대패 하였다. 이 전투가 봉오동 전투로 이와 관 련 내용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장세윤,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일제 탄압의 실 상-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 『동북아역 사재단 뉴스』, 20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