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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판결과 관련되어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모두 2년 가까이나 옥살이를 하며 고문 과 취조를 당하고도 미결구류일수가 겨우 150일, 즉 5개월밖에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결구 류일수는 보통 재판장의 재량에 따라 산정되었는데, 이는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인권침해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결구류기간을 법적으로 어떻게 이리 오래 끌 수 있었는가 하 는 것이다. 이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조선에 적용한 형사 사법제도가 인권을 더욱 억압하는 방향으 로 개악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22년에 종래의 메이지(明治) 형사소송법을 전면 개정하여 다이쇼(大正) 형사소송법을 공포함에 따라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도 대폭 개정하여 1924년부터 시행하였다. 개정된 조선형 사령은 검사의 피의자 구류 기간을 20일에서 10일로, 사법경찰관의 유치 기간을 14일에서 10일로 단축시키는 등의 개선사항이 있었다. 그러나 예심에서의 미결구류기간이 이전에는 2개월이고 매 1 개월마다 갱신할 수 있었던 데 반해, 개정된 법령에서는 예심에서의 구류기간이 3개월이고 갱신기간 이 매 2개월로 연장되었다. 조선총독부 검찰은 이를 이용하여 피의자에 대한 예심을 청구한 후 장기 간에 걸쳐 미결 구류 상태로 두고 예심 판사를 통하여 숱한 고문을 가한 뒤 유죄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상, 통의부 단원 9인에 대한 최종 판결문은 무려 2년 동안이나 법원에서 고문하고 취조한 결과 가 압축된 것이다. 예심 때까지의 조사기록이 12,000매에 달할 정도였다면, 이를 취조하는 과정에 서 항일 애국지사들이 당했을 고통과 압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을 것이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전기환과 김종철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고문휴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박영관의 경우도 평생토 록 불편한 몸 때문에 육체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았다. 이로써 일제 경찰이 피의자의 자백 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는지 알 수 있다. ② 판결문 기록에 의거한 전북폭발탄사건의 재구성 본 책자의 앞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밝혔듯이, 전북폭발탄사건의 발단은 대한통의부 단원인 조인 현의 국내 잠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인현은 1923년 3월 목포 관해여관에서 박영관을 만나 통의 부 단원에 가입시킨 것을 시작으로 조직원 포섭과 군자금 모집에 매진했다. 판결문 기록에 의하면 그가 국내로 들어온 것은 1924년 4월 이후이지만, 박영관의 생전 증언이 워낙 뚜렷한 기억에 바탕 을 둔 것이라 이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조인현이 적어도 1923년에 이미 국내에서 활동하 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다시 판결문 기록으로 돌아가면, 조인현은 1917년 불과 14세의 나이 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 독립단 통의부에 가입하고, 통의부 군부(軍部) 제3중대 제1소대 병사가 되어 약 8개월의 훈련을 받 았다. 1918년에는 통의부로부터 조선독립의 선전과 군자금모집 및 동규합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 스톡에 파견되어 약 1년간 활동하다 돌아와서 1919년에는 16세의 나이에 일약 특무조장으로 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