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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2025년 6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히로부미 통감 치하에서 이루어 졌지만, 실제로 하세가와의 진두 지휘로 이루어졌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삼았던 한국통감 이토는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 시 다다스(任董)를 서울로 불러들 였다. 하야시는 광무황제에게 헤 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하 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융희황제 (순종)를 세웠다. 그리고 이토는 7 월 24일에 정미칠조약을 체결하 고, 조약의 내용 가운데 ‘징병법을 시행하여 보다 정예한 새 군대 양 성을 위하여 준비 단계로 현 군대 를 정리’한다는 내용을 억지로 확 대 해석하여 군대 해산을 강행하 였다. 7월 31일 밤, 이토는 융희황제 의 칙령이라고 하여 이완용의 이 름으로 군대해산과 한국군 봉기 를 철저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 다. 하세가와는 일본군을 직접 지 휘하여 8월 1일 이른 아침부터 군 대 해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 산식에 불참한 시위 제1연대 제1 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군인들 은 무장 상태로 탈영하여 서울 시 내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 였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 령 박승환(朴昇煥)은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일부 병사 들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기 도 하였으나, 지방으로도 확대되 어 지방군인 진위대(鎭衛隊)도 해 산하였다. 군대 해산 이후 대한제국의 군 대는 행정업무만을 담당하는 친 위 보병 1대대, 기병 1중대 등만 남았다. 그마저도 1909년 7월 30 일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 대한 제국은 이미 자신을 보호할 수 있 는 능력이 전무한 이름뿐인 제국 이었다. 이를 획책한 이토와 함께 실행에 옮긴 군대해산의 행동 대 장이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 와 요시미치였다. 무단통치로 폭발한 3·1독립운동 하세가와는 데라우치에 이은 무단통치를 계속하였다. 데라우 치와 같은 조슈번 출신으로 데라 우치의 후광을 입고 부임하였으 므로, 자신만의 통치 방법보다는 전임자의 방식을 준수하는데 그 쳤다. 하세가와는 데라우치에 이 어 토지조사사업을 계속하여 마 1918년 영친왕 이은(李垠)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서 울 대학교 박물관 제공). 오른쪽 사진은 앞줄 가운데 부분을 클로즈 업한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친왕, 고종 , 순종(서울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