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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⑦ 115 을 설치해 회랑을 두르고 있는 점 과 목부재(木部材) 보아지(기둥과 보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을 보강 해주는 건축 부재)와 창방 및 마 루 받침 보부재(補部材)의 초각형 태, 목부재 기둥에 쌍사를 두고 있 는 점 등이 당대의 상당한 격식을 갖춘 건축물이라고 해석했다. 또 한 육각정이 벽제관과 관련해 남 아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점 도 귀중한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인정되고 있다. 벽제관은 조선의 2대 관문중 하나로 유일한 대외육 로인 관서대로 입구에 위치, 중국 사신 영접과 임금께 예를 올리고 왕의 능 행차시 행궁으로도 사용 되었으므로, 이에 걸맞는 기술과 품격으로 지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육각정이 이와쿠니 시에 있는 것을 보니 마치 십자군이 오벨리 스크를 뜯어다 런던, 파리, 바티칸 등 유럽 도시에 세워 놓은 것과 똑 같은 문화재에 대한 모독이며, 일 본 뿐 만이 아닌 제국주의의 약탈 행위가 정치·경제만이 아닌 문화 에도 극심하게 자행되었다는 것 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육각정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 까? 육각정 반환을 요구하는 고양 시 보고에 따르면, 하세가와는 ‘대 정 5년(1916년)부터 조선총독을 4년간 역임하면서 깃카와 히로이 에의 격전지였던 벽제관에서의 승리를 연모하여 그의 고향인 이 와쿠니 시에 기념물로 기증한 건 물’이라고 육각정 소개를 하고 있 다는 것이다. 일본 ‘정한론(征韓論)’의 근원은 임진왜란부터? 처음 계획은 육각정을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하고자 했는데, 현지 에 와보니 더 큰 민족적 반감이 기 다리고 있을 것은 예측을 못했다. 하세가와의 육각정 약탈이 임진 왜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니 일본인의 정한론 사상의 연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그 역사 적 근거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어떻든 하세가와는 깃 카와의 조선 침략 이후 300여 년 이상이나 흐른 1918년에 벽제관 에서 육각정을 약탈해 간 것이다. 3만 개가 넘는 조선인의 신체를 잘라 간 깃카와의 승전을 기념하 기 위하여 정자를 뜯어다 헌납한 것이다. 그리하여 깃카와의 고향 ➐  깃코공원에 있는 깃카와 히로이에 동상. 그는 임진왜란 때 벽제관전투에 참전하였다.  ➑  긴타이 다리(錦帶橋)의 모습(한겨레신문 제공). 임진왜란 때 조선인들을 학살한 깃카와 가문에서 세운 것이다.  ➒  깃카와 가문의 본거지인 이와쿠니 성의 천수각(天守閣)  ➐ ➑ 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