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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⑥ 115 내고, 육군원수가 되었으며, 작위 도 백작에 이르렀다. 1916년에 제2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이러 한 경력으로 볼 때 하세가와는 정 치인이라기보다는 군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무인이라 고 하기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 을 적극적으로 일선에서 무력으 로 진행시킨 인물로 전혀 정치성 이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세가와가 강요한 을사늑약과 군대해산 하세가와의 출세 배경에는 조 선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세운 공 로도 한 몫을 하였다. 1904년에 한국주차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하세가와는 대관정(大觀亭)을 자 신의 거처로 삼고 대한제국의 식 민화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에 그의 주거지가 있었던 대관정 일 대인 소공로를 자신의 이름을 따 하세가와쵸[長谷川町]라고 하였 다. 그의 식민지 조선 통치에 대 한 공헌을 인정한 처사였다. 그는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제2대 한국주차군 사령관, 초대통감 이 토오가 부임하기 이전 임시 통감 을 맡았다(1906.2.1~3.2).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는 을사늑약 체결 회의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경운궁(덕수궁) 주변을 포위하고 자신은 정장을 하고 이 토와 함께 광무황제(고종)에게 조 약체결을 강요하였다. 원구단에 는 야포를 설치하고 실전 연습을 하면서 전시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토를 시종하여 회의장에 나온 하세가와는 헌병과 함께 조약 체 결에 불응하여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에 게 일본도를 뽑아 죽이겠다고 위 협했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일 명 을사5조약)이 체결되었다. 을 사늑약에 찬성 서명하였던 을사5 적으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 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 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 현이 거론되지만, 한편으로 이를 죽음으로 거부한 을사7열도 기억 해야 한다. 을사7열은 전 참판 홍 만식, 시종무관장 민영환, 전 정승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병정 김봉학, 주 영 대리공사 이한응 등으로 모두 자결로 순국하였다. 그 밖에도 많 은 애국지사들이 을사5적을 죽이 려 하였고, 일제에 대한 저항은 지 속적으로 진행되다가 의병전쟁으 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은 이토 1909년 당시 대한제국 주둔 일본군(한국주차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세운 서울 용산의 조선총독 관저(1910년대). 많은 비용을 들여 화려하고 웅장하게 세워 당시에 도 구설수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