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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2025년 7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참전하였다. 그는 1952년 6월, 경 상도 개령을 본거지로 활동하다 가 의병들이 관군과 연합작전을 벌이게 되자 문경 지역으로 이동 하여 우복룡의 군대와 접전하였 다. 우복룡은 당시 용궁현감으로 재임하고 있으면서 군사 1천여 명 으로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당시의 왜군 장수가 깃카와였 다. 또 깃카와는 행주전투에 참 전하여 부상을 입었다고도 한다. 깃카와 가문은 임진왜란에서 많 은 조선인들을 학살한 대가로 일 본에서 대대로 현달하였다. 깃카 와의 만행은 금병동(琴秉洞) 선생 의 『이총(耳塚)』에서 확인할 수 있 다. 금병동 선생은 깃카와 집안의 문서인 『깃카와가 문서(吉川家文 書)에서 그가 잘라간 조선인의 귀 와 코의 숫자를 확인하였다. 무려 31,447개에 이른다고 하며 그 내 용을 깃카와가 집안 문서에 자랑 스럽게(?)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의 목·코·귀는 참전 장수들의 군공(軍功)을 정하는 기 준이었다. 그 숫자에 따라 전공이 인정되었다. 임진왜란때 침략군 제2선봉대장이었던 가토 기요마 사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하루에 3 개 이상의 조선인 코를 잘라 오게 하였다고 한다. 연구자에 따라 다 르기는 하지만, 금병동 선생은 10 만 이상 조선인의 귀·코와 목 등이 교토[京都]의 이총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금병동 선생은 재일사학자로 한일관계사를 민족 주의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를 하 였다. 육각정의 문화적 가치 가까이서 보니 육각정은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정자인 것이 너무 확실했다. 그리 고 아주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었 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재 고양 시에서 문화재청 등 관련기관과 함께 환수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양의 최성 시장이 직 접 이와쿠니시를 방문하는 등 사 절단을 보내기도 하고 서명을 받 기도 했다고 한다. 고양시의 방문조사 결과에 따 르면, 육각정은 건축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육각 정 정자의 기둥들 사이를 머름으 로 연결해 내부공간으로 사용하 고 바깥쪽에 아자교란(亞字交欄) ➍ 금병동 선생의 저서 『이총(耳塚)』 표지(필자 제공) ➎ 육각정 바닥과 내부 모습 ➏ 육각정 천정의 모습 ➍ ➎ 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