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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런 우리 것들 114 2023년 3월 든 수많은 한인이 만주로 만주로 향하였다. 청나라는 1740년 “여긴 우리가 태동한 땅이니 신성한 곳이라. 아 무도 발 들이지 말라.”라고 명하고 유민들을 귀환하게 하였다. 이른 바 봉금정책이다. 현재 두만강 북 쪽 강기슭인 서·북간도 지역을 봉 금 지역으로 선포해 누구도 들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이곳은 원시 림이 되었고, 농토가 비옥해져 농 사짓기는 물론 온갖 산물이 풍부 한 곳이 되었다. 1869년부터 1871년까지 3년 에 걸친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 엄 청난 대흉이 들었다. 기근을 이기 지 못한 이 지역 주민들은 두만강 을 건너 간도에서 도둑 농사를 지 었다. 봄에 가서 씨를 뿌려놓기만 하고, 가을이 되면 다시 월강하여 봄에 심은 곡식을 거두어 오는 ‘춘 경추수(春耕秋收)’ 형태였다. 이를 ‘계절이민(季節移民)’이라고도 했 다. 사실 이는 죽음을 무릅쓴 월강 농사였다. 다행히 1883년의 ‘조길 통상장정(朝吉通商章程)’에 따라 1885년 용정에 통상국(通商局)를 설치하면서 공식적인 월강 농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처음엔 기근을 극복하고자 함경도 평안도 주민들 이 간도로 이주하여 화전(火田) 등 의 농업을 시작으로 기근을 면하 고, 한인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일 본의 침략이 사실화되면서 국내 의 독립운동은 어렵게 되었다. 이 에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려 는 신민회 등의 움직임이 본격 화되 면서 용정, 서간도 유화현 등이 해 외 독립운동기지로 주목받게 된다. 서간도에는 석주(石洲) 이상 룡(李相龍, 1858~1932)을 비 롯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우당(友堂) 이회영 (李會榮, 1867~1932) 가족이 유하 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를 중심 으로 이주하여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 所)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 설을 시작하였다. 북간도에서는 이상설(李相 卨, 1870~1917), 이동녕(李東 寧, 1869~1940), 정순만(鄭淳 萬, 1873~1911), 여준(呂準, 1862~1932) 등이 1906년부터 용 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 연자방아(1908년, 간도사진첩, 규암독립사상연구소 제공) 동불사(연변 마을)의 벼농사(1908년, 간도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