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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⑦ 113 안내문에는 육각정은 한국 경 기도의 벽제관(碧蹄館)에서 온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어로 된 안내문에는 육각정이 1918년 에 벽제관에서 ‘건너 온[到來]’ 것 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육 각정은 하세가와가 조선 총독으 로 재임(1916~1919) 중에 이 곳 으로 가져 온 것이다. 하세가와라 는 인물은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 이 치미는 짓만 우리 민족에게 했 던 가혹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우 리는 이런 하세가와를 공교육에 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세가와와 벽제는 어떤 관계? 하세가와는 왜 벽제에서 정자 를 뜯어갔을까? 조선시대에는 육 각정보다 더 뛰어난 정자들이 곳 곳에 축조되었는데, 하필 벽제의 육각정을 선택했을까? 그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때까 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와쿠 니의 다이묘[大名]로 임진왜란에 출진하였던 깃카와 히로이에[吉川 広 家]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깃카 와 히로이에는 이와쿠니번의 초 대 다이묘로 깃카와 가문은 지금 까지도 이 지역에서 실력 있는 가 문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세가와는 어려서부터 임진왜 란의 벽제전투에서 왜군에게 승 리를 안겨 준 깃카와 히로이에를 존경하며 성장하였다. 벽제전투 는 임진왜란에서 왜군에게 의미 가 큰 전투이다. 한양을 함락하 고 북진하였던 왜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대패하여, 고니시 유 키나카[小西行長] 등은 구로다 나 가마사[黑田長政] 등 다른 지역으 로 진출한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이때 개성 을 수비하던 고바야카와[小早川隆 景] 등의 장수들은 벽제에서의 일 전을 계획하였다. 일본군은 벽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패 한 명나라군은 개성으로 퇴각하 였다. 왜군은 행주전투에서 조선 군에게 다시 대패를 하였지만, 이 벽제전투는 왜군이 승리한 중요 한 전투였다. 이때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부장으로 ➊  제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위키백과 제공)  ➋  하세가와의 고향 이와쿠니시 깃코공원에 있는 팔각정 전경(이하 현장 사진은 필자 촬영) ➌  팔각정 안내문. 일본어와 한국어로 표기돼 있다. ➋ ➌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