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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6월30일 월요일 11 (제222호) 독자마당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풀어쓰는 茶山이야기 수원은 경기도의 도청소재지로, 경기 도를대표하는큰도시입니다.그런수원 에는 유명한유적도많고 역사적기념물 들이즐비하지만그모든것중에서도특 별히 유명한 것은 ‘화성’이라는 아름답 고 견고한 성(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 로 등재되어 세계인들이 감탄하는 성이 되었습니다.그런데이성은조선의정조 임금과다산을빼놓고는이야기할수없 는국보급문화재입니다. 1792년 음력 4월 9일 진주목사(晉州牧 使)로 근무하던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 (丁載遠)이 근무지 현장에서 별세합니 다.그해 5월 다산 형제들은 진주로 달려 가 충주(忠州)의 하담 선영으로 목사공 을 반장(返葬)합니다. 장사를 마친 다산 형제들은 고향 마현(馬峴)으로 돌아와 곡하고 여막을 짓고 거처합니 다. 아끼던 신하 가 상을 당했다 는 소식을 들은 정조는 경연의 신하들에게장례 는 제대로 치렀 으며,슬픔을이기고건강은제대로회복 하였는가를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그러 면서 정조는 다산에게 상중(喪中)이지 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폐할 수 없 다면서 국가의 대역사인 수원성[華城] 의규제(規制)를지어올리라는하명(下 命)을내렸습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그때임금이 내린하명이 기록되어 있는 데,왜다산에게성제(城制)에대한글을 올리도록 했는가라는 이유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유년(1789)겨울 배다리를 놓은 역사(役事)에 정약용이 그 규제를 만 들어 공(功)을 이루었으니, 그를 불러 집에서 성(城)의 규제를 만들어 바치 게 하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다산은 집상 중에, 여러 옛사람의 좋은 성제를 참고하고 훌륭한 제도만을 취 하여 초루( 힌樓)·적대(敵臺)·현안(懸 眼)·오성지(五星池)등의 여러 법도를 조목조목 나누어 정리하여 바쳤습니 다. 성제를 바치자, 임금은 또 『도서집 성』과 『기기도설』을 내려주면서 인중 (引重)과 기중(起重)의 법을 강(講)하 라고 명하자,다산은「기중가도설(起重 架圖說)」이라는 기중기·거중기 등의 사용법까지 올려바쳤습니다. 그런 사 용법에 의해서 활차(滑車)와 고륜(鼓 輪)이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잘도 옮겨놓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도르래의 원리, 지렛대의 원리를 통해 제작된 기중기(起重機)와 같은 것으로,인력은적게들고큰공역을마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성을 쌓는 일이 끝나자, 기쁨을 이기지 못한 임금이 다 산에게큰칭찬을아끼지않았습니다. “다행히 기중기를 이용하여 경비 4만 양이나 절약되었다(幸用起重架 省費錢 四萬兩矣)”라고말했다는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원의 화성은 다산의 지 혜와 능력이 발휘되어 완성된 성입니다. 애초에는 10년을 공기(工期)로 잡았으 나 기계의 활용으로 2년 9개월에 완성되 었으니, 이 또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당시일부신하들은 경비가과다하고오 래도록 공사를 하다보면 백성들의 피해 가크다고반대의견을제시했지만,다산 의 공으로 빠른 공사, 작은 비용으로 마 쳤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경기 도, 수원, 화성 역시 다산을 말하지 않고 는 거론하기 어려운 곳들임을 이런데서 알게됩니다. 다산과 화성(華城) 세대간,진영간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 는 문제가 한국사회에 중요하게 대두되 고 있다. 사회통합이 왜 중요한가? 사회 통합이 미흡하면 성장의 발목을 잡아 일 류 선진국가로의 도약이 어렵기 때문이 다.한국의사회갈등수준이매우심각하 다.지도층의 도덕성이 선진국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고, 정부의 관리 역량도 저평가 받고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그러나 많 은 사람들이 선진국이라 느끼지 못하고 있 다.사회적으로대형사고,재난,취업,주택가 격,교육문제,인구감소등불안과불확실성 이확대되고있고,둘째는사회적으로집단 이익추구와배타성,양극화등불신과낮은 신뢰가자리하기때문으로보인다. 프레든 허쉬라는 학자는 <L imits to gr owth>라는책에서국민소득2만불넘으면 행복감이정지된다는풍요의역설을제시 했다.소득이 높아지면 배고픈 Hungry 사 회에서배아픈Angry사회로변한다고한 다. 경제적인 더 많은 성장이 추가 행복을 가져오지못한다고보고있는것이다. 갈등은 효과 적으로관리되면 국가발전의 에너 지가 될 수 있지 만, 갈등이 방치 되면 사회가 분 열되고국가발전 이 저해된다. 빈 부갈등 관리에 실패한 아르헨티나가대표 적이다.20세기초아르헨티나는세계5대경 제부국으로, 비록 소득불평등은 중남미에 서가장심각했지만1인당GDP가서유럽과 비슷했다. 소득불평등 문제만 해결되면 선 진국도약이가능한상태였지만,그러나정 치인들이 빈부격차를 치유할 정책은 하지 않고 빈부갈등을 정치적으로 이용만 했다. 그러다보니,만년중진국으로전락했다. 한국사회는 지금 사회갈등과 관련해 중 대한기로에있다.국민은공정성이높은사 회를 주장한다. 누구에게도 반칙은 용납할 수없으며특권은안된다는분위기이다. 갈등때문에지금한국사회가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첫째는 심 판을 믿지 못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것 이다.법을만들고,집행하고,위반자를처 벌하는심판역할의기관이나 사람들의권 위가 점점 실추되고 있다. 심판이 선수의 역할까지도하는경우가있고,심판의자질 에의문이제기되고있기도하다.둘째는사 회지도층에 대한 불신도가 높아지고 있다. 도덕적 해이 현상은 심한 반면에 노블레스 오블리주활동은빈약하기때문이다. 갈등이줄어들기위해서는‘포용과신뢰’ 라는 사회질(Social Quality)이 축적되어야 한다.사회질의축적이미흡하니충돌과분 노가빈발한다.87년6.29선언이전까지는가 난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경제성장이 중요했고,한국은물질적자본(MaterialCap ital)을축적하는성과를거뒀다.6.29부터200 0년까지는 장기집권으로부터 해방되기 위 한민주화가중요했고,우리는인적자본(H uman Capital)을 길러 문제를 해결했다. 그 러나그이후민주화시대부터는포용과신 뢰라는 사회적자본(SocialCapital)을축적 해야하는데,그렇지를못해지금의갈등폭 발상황을맞이한것이다. 사회질 (Social Quality)은 4가지 범주 로 나눠진다. 사회경제적 안전성, 사회적 응집성, 사회적 포용성, 사회적 역능성이 다.세대 간에 성장환경의 차이 때문에 생 기는 세대 간의 문제도 대화부족과 공감 부족이부채질하고있다.사고방식과문화 의 차이,정치적 지향에 따른 간격도 심각 하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간 대화 부족 문제가 심각하고, 부모들이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욕망과집착도세대문제 를발생시키고있다. 사회통합은 불평등과 불신을 줄여나가 면서구성원들이서로를이해하고포용하 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는 국가 사회적으로통합을촉진하는방향으로가 야 한다. 경쟁과 효율만 강조하면 통합이 어렵다. 패자부활전이 가능토록 하고, 사 회제도들의투명성이높아지도록하면서, 믿음과신뢰라는인프라는구축해야한다. 신뢰는불확실성을줄여서사회구성원간 에 ‘협력과 참여’를 창출하는 무형자산이 다. 한국은 관계자본은 과잉공급이지만, 도덕적용량은과소공급상태이다. 사회지도층들은 도덕성과 사회적 책 임에서한참뒤떨어져있다.반칙과특권 이 없는 공정성과 지도층의 최소한의사 회적 책임이 중요하다.자동차가 운행되 려면 엔진과 브레이크가 서로 역할을분 담하고잘작동해야한다.성장정책이엔 진이라면사회통합(공정성)은브레이크 다.엔진만작동하고브레이크가듣지않 는다면 그 차는 운행될 수 없다. 지도층 의자원봉사는그한방법이다. 사회통합은자동차의브레이크,시급히강화해야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나는 이전에도 말했듯이 단재 신채호 가 븮묘청 난븯을 븮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 대사건븯 이란 평가를 감동적으로 받아 들 였다고했다. 또한신채호븮조선상고사븯영향으로븮김 부식과 삼국사기븯를 표피적으로만 바라 보며 비판한 글을 일간지에 기고문으로 쓰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를 좀 더 깊이 들 어 가 보니 븮묘청 난븯이 당시 사건에 비해 신채호에 의해 상당하게 부풀려진 것을 느꼈다. 신채호는 븮묘청 난븯을 왜 그렇게 부풀려서 보았을까? 그 이유를 알기위해 서는 신채호가 븮조선상고사븯를 쓴 이유를 알아야 한다. 신채호는 본디 영웅주의 민 족주의 성향을 짙게 띠었으나,러시아 혁 명 이후 민중사관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성향으로 사상의 변화를보였다. 그래서 지금 극우단체는 신채호를 공 산주의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내가 오늘 쓰는 글은 신채호의 역사관 문제점을 지 적하기는 하나 신채호 민중적 역사사관 을 비판 하려는 것은 아니다.븮조선상고사 븯는신채호가당시처한상황과당시그가 가지고 있던 역사관으로는 충분히 주장 할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가 좀 더 넓어진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본 신채호 역사적 시각은 지나치게 민족주 의와 투쟁과 저항주의에 빠져있어 객관 성과 공정성에서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는 것이다. 신채호 역사관은 기 존 역사인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역사 인 식체계를수립하려 했다. 신채호 역사 관에 좀 더 깊이 들 어가보자! 신채호가 븮조선 상고사븯를 집필한 이유는 단순히 과 거 사실을 정리 하 려는 학문적 시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현실 속에서 조선민족이 왜 스스로를 잃어 버렸는지를 파헤치기 위 해이책을썼다. 당시 신채호 역사인식은 철저히 우리 민족 관점에서 주체적인 입장이었다. 신 채호는 뷺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 다뷻는문제의식을갖고있었고,당대지식 인들이공유하던 유교중심사관, 계몽주 의적개화사관,그리고일제식민사관모 두가 결국 ‘주체 없는 역사’를 만들어왔 다고 통렬히 비판했다.조선시대 성리학 자들이스스로중국을높이고조선을낮 춘 사관,그리고 일제가 강요한 ‘타율성’ 의 역사인식은 신채호가 보기에는 모두 븮사대의 역사븯였다.그는 이런 왜곡을 바 로잡기 위해 븮조선상고사븯를 저술했다 고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신채호에 게 조선상고사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는 수단이아니라,민족의주체성과자존을 회복하기 위한 저항의 문서였던 것이기 도 했 다 . 신채호가 븮조선상고사븯에서 보인 가장 특징적인 역사인식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찬양과,신라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신채호는 고구려와 백제를 ‘부여계 정통 민족국가’로 간주하며, 외세에 맞서 싸운 독립적 주체로 그린다.반면,신라에 대해 서는 민족 정통성과 투쟁성 모두에서 결 함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신라가 삼국통 일 과정에서 당나라 군대를 끌어 들였다 는점을크게 문제 삼았다.신채호에게 있 어이는단순한외교전략이아니라,자주 성을포기한‘사대의결정적사례’였던것 이다. 더 나아가 그는 김유신 중심으로 한 신 라통일과정을븮음모와배신역사븯로규정 하고, 이를 븮정통성 없는 축소통일븯이라 평가절하 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함 으로써 부여계 민족 자주적 흐름이 단절 되었으며, 이후 신라가 지배한 통일국가 는 외세에 의존하는 새로운 사대의 시대 를 열었다고 보았다. 결국 신채호는 신라 가 이후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은사대주의전통을남긴‘시작점’이라 고 보았으며, 신라의 역사적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는 신채호가 고구려를 ‘투쟁의 역사’로, 신라를 ‘굴종 의역사’로구분한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신채호는 묘청이 잊혀 져 가고 있던 옛 고구려기상을 부르짓고, 븮칭제건원븯하는 것을 <일천년 내 대사건> 으로 아주 높이 평가한 것이다.이에 비해 븮묘청 난븯을 진압한 븮김부식븯 행위는 고구 려기상을 짓밟고 신라를 계승한 사대주 의 승리로 보았고, 이후 우리나라가 영토 도,정신도한반도에만고착시키게된계 기를 만든 주역으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게다가븮묘청의난븯을진압하고쓴븮삼국사 기븯는 고구려기상으로 표현된 우리민족 기상을 관에 넣고 못 박아버린 것으로 보 았다. 이처럼 신채호 사관은 우리 민족 자주 성과 역사 주체성을 기준으로 고대사를 평가했으며, 이는 단지 과거의 문제가 아 니라,현재조선민족이나아가야할방향 을 제시 하려는 실천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채호 사상은 또 하나의 커다란 명제 를바탕에두고있다.신채호는역사를‘아 (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헤겔식 변증법과 유사한 역사 발전의 원 리를 받아들였으며, 모든 역사 서술은 시 간적으로 계승되고 공간적으로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즉,뷺어떤 역사적 원리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특 정 지역이나 민족을 넘어 전 인류 에게도 적용 가능한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뷻는 주 장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신채호 이런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점도 함께 내포 되어 있다고본다.인간역사란 본래 시행 착오와실험,선택의누적이며,시대와 공 간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전개된다. 가령극단적인예로17세기에갈릴레오가 주장한 븮지동설븯은 오늘날 누구나 인정하 는 과학적 상식이지만, 그 당시 시대에는 종교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갈릴레오는 이단으로낙인찍혀종교재판에넘겨졌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서 자기 신념을 부정하고 나서야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재판장 문턱을 나서면서 갈릴레 오가 했다는 말 뷺그래도 지구는 돈다뷻는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 명언이 되었다. 이처럼 시대적 인식과 가치관, 과학수 준에 따라 진리는 끊임없이 변모한다. 신 채호가제시한‘보편적역사원리’는그자 체로 강한 철학적 함의를 담고는 있으나, 자칫하면 역사 상대성과 맥락성을 무시 한 이념적 환원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역 사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다양한 조건 속에서 진화하고, 각 시대마다 그 의미는 다르게 구성된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갈 릴레오처럼 그 구성원들이 넘을 수 없는 븮시대적한계븯도분명존재한다. 만약 절대불변 역사원리가 존재한다 면,우리는더이상역사를공부할필요도 없고,해석할필요도없다.결국신채호역 사인식은 민족주의와 실천적 투쟁의지를 중심으로 큰 틀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진 정한 보편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다층적 해석과 비판적 성찰이 병행되어 야 한다. 또신채호는“역사는다른목적없이그 자체로 기록되어야 한다”며 븮실증주의븯 역사이론을 주장 하면서도, 스스로 '조선 상고사'를 민족사 재정립이라는 의도 아 래 실증주의와는 다르게 집필했다. 그가 강조한 ‘단군중심 고대사’, ‘고구려와 백 제를 부여족 후손 국가로 설정’, 그리고 ‘신라축소통일론’등은모두민족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실증주의와 전혀 다르게 의도된서술이다. 신채호가 감옥에서 집필했던 한계로 실증적 검증이 부족한 부분도 존재하기 는 하지만, 때로는 고대영토를 과도하게 확장서술하거나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다 는 식 주장은 현재 기준으로는 확실한 사 료가 없어서 신뢰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의 역사관은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운다는 긍정성과 함께, 비 판적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도 함께 가지 고있다.어쨌든신채호븮조선상고사븯는일 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민족 뿌리를 찾 기위한절박한의지산물이었다. 특히 이는 신채호가 유교사학과 식민 사관 영향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교도 소 복역 중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민족중 심의 고대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의미가있다. 븮조선상고사븯는 단군시대부터 백제부 흥운동까지 12편에 걸쳐 서술되었으며, 식민사학에 맞선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 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채호는 조 선상고사 서문에서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 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 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 적 활동 상태 기록이다.” 이 말은 여전히 인상깊지만,나는여기에한마디를덧붙 이고싶다.“역사는투쟁이기도하지만,오 류의 반복을 피하려는 인간의 성찰이기 도하다.” 신채호븮조선상고사븯와븮묘청의난븯 박 철 홍 전남도의회前의원븡담양군종친회사무국장 숭덕전 전, 릉 참봉을 역임하신 회원님과 자매회 회원 일행은 2025 년 5월 28일 1일 일정으로 영덕군 일대를 답사 유적지를 견학하기로 하고 이날 10시 숭덕전 주차장에서 만나 신라 광광 28인승 리무진버스 에올랐다 전임제221대전참봉을지내신9 1세의박동준전참봉님과직전제2 26대전참봉님이신기태전참봉님 도 함께 동행 하였다. 제17대 유리 왕릉참봉을지내시고사단법인숭 덕전전,릉 참봉협의회제6대 이사 장을지내신박진국참봉께서도아 름다운 동행 인(人)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이날일행은숭덕전주차장에서 10시 정각에 영덕 박씨종친회 회 관이 있는 곳으로 출발하게 되었 고 승차한 일행은 즐거운 마음으 로 가족애를 발휘 우리 인생사에 서나 동 식물들의 삶에서 보아 오 듯이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 고 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쉬고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야 행복해집니다. 맹수는산이 깊어야살고지렁이 는 흙이 있어야 하며 나무도 썩은 흙이 있어야 잘 살고 뿌리도 깊이 내릴수있다. 이렇듯 만남도 연(緣)의 끈이 되 어서로서로기대고도우며살고받 는즐거움도주는이가있어야하고 먼저주는사람이되어보는것도행 복이다 고로주는사람과받는사람이있 어야행복하다.그러므로모두가좋 아하는일을하면서즐겁게행동하 고좋은표정지으며긍정적인사람 이되도록노력하는것이아름다운 행복이다. 삶에좋은인연(因緣)이란?직간 접적으로연을맺고서로위로하며 슬픔보다기쁨을주고원망하는인 연보다 한결같이 감사하는 마음으 로 짐이 되지 않고 힘이 되는 연으 로걸어가는것이동반자관계의인 연이 아닐까요? 비관과 절망이 죽 음에이르는병이라면낙관과희망 은 행복의 문을 열고 갈 수 있는 멋 진 연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 습니다. 그후우리일행은강구까지나와 아름다운 인연으로 맞이해준 박대 락 참봉님의 안내를 받으며 사)신 라오릉보존회영덕군박씨종친회 관앞에도착하니우리일행을따뜻 하게 손잡아준 박정일 종친회장님 의배려와정성을다해준비해둔점 심식사는우리일행모두를환희의 얼굴로웃음꽃을피우게하였다왜 냐하면영덕바다에서아침에잡아 올린 미주 구리 회 무침과 영덕 쌀 밥에 반주까지 함께 종친회관에서 먹게되에큰집에온기분을연상케 하였다. 식사후추리닝선물도받아행복 했다.우리는영덕종친회장님께찬 사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정일 회장님감사합니다. 다음은차를 타고영덕군 축산면 소호 종택을 찾았다. 건물 전체가 대문체 정칩 내삼문 사당으로 구 성정침은정면10칸측면7칸ㅁ자 형으로 사랑채는 8각 지붕 안채는 맞배지붕이다. 한두 차례 보수를 거치며부분적으로변경되었다.고 졸한 파련대공 품격을 지니고 있 는 큰 저택에 무이공 불천위 사당 까지 갖추고 있는 중요한 저택이 다. 박의장 장 군 은 임 란 때 경 주 판 관 경 주 부 윤 울 산 도 호 부 사 경 상 좌 도 병 마 절 도 사 등 역 임 임 란 극복에 공이커 선무원종 공신 일 등에 녹훈되었다. 서거 후 자헌 대부 호조판서에 추중되고 부조 를 명 받 았 다 . 그 후 무 의 공 시 호 가 내 려 종 택 에 서 선 시 례 를 거 행 하였다. 다시 일행은 인량리의 8종가의 역사와현존상태를살펴보고이종 택이국가유적지란사실을알고영 덕을 다시 보고 싶은 군이란 것을 알게되었다. 그후영덕시장내부의모습도살 펴보고홍게간장공장내부도견학 하고맛있는간장도구입하고유익 한하루를즐기고영덕군박씨종친 회장박정일님의정성에감사를보 내며경주를향해15시30분경달려 오게되었다 (사)신라숭덕전·릉참봉협의회유적탐방답사기 박영택 참봉협의회사무총장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재기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5)352-7224 FAX(055)352-7225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50429 경남밀양시내일중앙길11밀성회관1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