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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이강년의병부대 갈평전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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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평전투는 운강의 후기 의병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로 기록되어 있다. 문강의 병부대는 1907년 8월 15일 제천전투에 승리한 후 8월 23일 충주 성 공격에서 물러나, 9월에 접어들어 명봉사·동로적성을 거쳐 김용사 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9월 7일 문경읍을 장악하였다.
9월 10일 운강은 조령에서 이인영부대와 격전하는 일본군을 물리치고 부대를 거두어 혜국사를 지나 요성쪽을 향해 행군하였다. 이동 중에 갈평 쪽에 적의 부대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일본군은 조동교· 김현규 부대를 격파하고 갈평 일대의 민가 100여호에 불을 놓았다.
이들은 승전 이후 신북천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운강은 급히 병력을 갈평쪽으로 이동시켰다.
용연에서 운강은 부대를 넷으로 나누어 40여명의 일본군경을 포위하 였다. 우선봉 백남규는 갈평 남산에, 좌선봉 하한서는 갈평 북산에,
우군선봉 천용일은 갈평 동산으로 오르게 하였다. 또한 총독장 이만원은 보수병을 거느리고 중앙으로 공격하면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운강은 노획
물자를 거두어 용연으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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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평전투는 9월 10일~11일 양일간에 걸쳐 일본군 1개 소대를 괴멸시키 는 전과를 올렸다. 신래식과 이민영 부대가 운강 주력부대와 연합하여 이룬 큰 승전이었다.
운강은 잿더미가 된 갈평 上村 마을 주민들을 위로하였다. 다시 당포 쪽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을 추적하였다. 요성에서 적장 戈田三太郎을 斬殺하였다. 후군장 신대원은 일본 육군보병 孔哥是大土村(산북면 대 하리) 앞에서 斬하고 총과 환도를 노획했다. 그 결과 일인 순검과 일본군 등 6명을 포살하였다.
이후 며칠간의 전과도 적지 않았다. 늘목(마성면 외어1,2리)에도 일본군이 도망쳐 왔다는 보고가 있었다. 부대를 나누어 연작상(마성면 외 어리)까지 추격하여 몰아냈다. 늘목으로 달아난 일본군 4명을 찾았다는 보고가 있어 중군장 김상태가 쫓아 연작살에 이르니 적은 이미 石峴關 (고모산성)에 출현하여 있었다. 다시 요성으로 향하여 글록 뒷골에 크게 陳을 치고 적 1명을 효수하였다. 능목쪽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던 이인영부대와 만났다. 다시 병력을 합한 후, 부운령(마성면 늘목~호계 연상선암)을 넘어 마골(호계면 상선암)에서 휴식을 취한 후 9월 13일 대승사로 진군하던 중, 공연에서 집강 김홍규가 일본군 2명을 발견했다는 보고에 의병을 보내어 포살하였다. (운강창의일록, 창의 사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