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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5회) • 평북 철산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2) 105 기독교로 개종 1900년 즈음, 고향 친구인 유상도 (劉尙道)가 찾아왔다. 그는 정주 최초 의 개신교회인 정주읍 교회를 1899 년에 세운 사람이었다. 이후 정주에 는 1938년까지 교회가 29개로 늘어 났다. 유상도는 이명룡에게 말했다. “철산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는 신약성경의 4복음서를 1편씩 번역되는 대로 책으로 묶은 쪽복음서를 전하며 개종을 권했다. 이명 룡은 쪽복음서인 누가복음을 읽고 감화를 받았다. 정 주읍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1902년, 그는 한글 성 경을 번역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에게 세례를 받았다. 29세 때였다. 그는 일단 기독교인이 되자 주일을 반드시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아버지 친구 동업자가 안식 일에 장사를 하지 않는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교회를 그만두든가, 장사를 그만두든가, 양자택 일을 하라!” 이명룡은 이렇게 대꾸했다. “동업을 못하면 못했지, 안식일을 어길 수는 없습 니다!” 이명룡은 아버지의 친구인 동업자와 결별했다. 자 기 가게를 차렸다. 그러자 주일에 쉬는 이명룡의 가 게에 더 많은 손님이 몰려왔다. 정주에서 포목상과 대금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 는 조선 청년 교육을 위해 학교 기성회 조성에 많은 기부를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1902년 상업 회 의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식산흥업과 상인들의 권 익옹호에 앞장섰다. 망국의 상황과 신민회 참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 고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나라가 망하 는 것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1907년 초 미국에서 안창호가 들어왔다. 국권 회 복을 위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 었다. 정주의 실업가요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이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을 받아 신민회에 가입하고, 이 명룡에게도 가입을 권유했다. 이승훈의 권유에 따라 1908년 3월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암묵적으 로 국민주권의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전국의 애국지 사 결집, 자유와 독립을 위한 신사상, 신교육, 신산업 운동을 일으켰다. 일제 당국은 신민회의 활동을 주시하다, 1911년 안명근의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이용해 신민회를 배후로 연루시켰다. 신민회 회원 및 기독교계 인사 389명을 체포했다. 정주지역 신민회 간부였던 이명룡도 1911년 10월 체포되어 경성(京 철산군 참면 차련관 교회의 모습 (이상 필자 제공) 철산 출신 민족대표 이명룡 이명룡에 큰 영향을 준 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