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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2025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6회) 을 지어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각 관공서를 돌며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경찰들이 출동했으나, 5천 명의 시위대를 제압할 수 없었다. 철도엄호대 병사 7명이 응원 출동 하여 공포탄을 쏘며 진압에 임했다. 군중은 돌을 던 지며, 총검을 빼앗는 등 거세게 저항하였다. 경찰과 철도엄호대 군인들이 실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 생했다. 오후 1시 40분, 길바닥은 피로 물든 가운데 시위군 중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흩어졌다. 조선주차 군사령부 사상자 수 집계(1919.9.29)에 의하면 이날 사망 6명, 중상 7명, 경상 49명이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임신한 여성도 1명 포함되었으며, 중상자 7 명은 위독한 상태여서 실제 사망자 수가 늘어났을 것 이다. 검거된 인원은 75명에 달하였다. 사상자로 인해 철산 분위기는 흉흉했다. 이에 정주 엄호대(定州掩護隊)로부터 장교 이하 10명의 군인이 철산으로 추가 파견되어 경계를 강화하였다. 철산의 만세시위 사상자 발생은 장로교 선교사 노 먼 C.휘트모어(Nor man C l a r k W h i t t e m o r e , 1896~1935 한국 봉사) 가 미국 총영사 베르홀츠 (Bergholz)에게 보내는 편 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보고 되었다. “확실한 소식통에 의하 면, 지난 주 목요일 혹은 금 요일[3월 6일, 7일]에 서쪽 으로 바로 옆 고장인 털산골(Tyul San Kol)에서 여섯 명의 한국인이 사살당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1운동 직전 상 해로 망명하여 각지 3 · 1운동을 조사하여 펴낸 김병 조(金秉祚)의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 에는 철산면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철산 시위운동 철산군은 인민 만여 명이 안태영 김영락 유봉영 등 의 사람들의 주도로 시위했는데, 일병이 고막을 찢는 소리로 발포하여 김수성(金壽咸), 안정명(安定明), 김 효운(金孝運), 이석중(李錫重), 정석당(鄭錫唐), 유희선 (劉熙善), 박치율(朴致律) 7인이 당시 순절했다. 안정명은 13살 아이라. 또한 과부의 독자로 3발의 탄환을 맞고, 수십 차례 창으로 난자당하여 죽기 직 전에 어머니와 작별하며 말하기를, “저는 상제께로 떠납니다. 내 가슴에 창 자국이 열인지 백인지 헤아 철산의 만세시위와 사상자 발생을 보고한 위트모 어 선교사 부부 3·1운동 이후 철산의 민심 등 동향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평안북도 장관 후지가와 리자부로(藤川利三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