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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잔인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저 무정부주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의열단원으로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동척을 습격한 나석주의 동지로서 서로 많은 연락을 한 사실까지 판명되어 조선으로 호송되었다(동아일보, 1928.5.18). 또한 나석주의 사촌동생인 나모(羅某)는 을지로의 어느 여관에 유숙했다가 경찰의 탐지로 잡혀서 취조당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28.11.9). 이상, 박영관을 비롯한 통의부 단원들이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을 습격, 폭파하려 했던 계획은 당시의 시대분위기를 고려하면 충분히 예상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의 장례일을 기해 다시 점화된 6.10만세운동은 비록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 지면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잇달았다. 이는 3.1운동 이후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 었고, 같은 해 말에 일어난 나석주 열사의 동척 습격 의거는 이런 항일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해주었 다. 더욱이 다른 기관도 아니고 동척이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수탈의 정점에 동척이 있다는 것을 식민지 민중 모두 에게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1920년대의 전북 지역은 농수로 개량사업과 간척을 통해 미곡생산량의 급증했지만, 이에 비례하 여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 농민의 빈부격차는 극과 극으로 벌어졌다. 게다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미곡 의 절반 가량이 전북 지역에서 공출될 정도로 전북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전북 지역 중에서 도 특히 만경강 하구의 익산⋅김제⋅군산은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민중 상호간의 모순이 가장 첨 예하게 대립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 세워진 전국의 동척 지점 중 전북 지점에 해당되는 이리동척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조선 민중의 적개심이 집중된 곳이었다. 여기에 경성지점 폭파가 미수에 그쳤다는 점도 통의부 단원들이 실행 의지를 불태우는 동기가 되었다. 그동안 조인현의 지휘 아래 전라남북도에서 개별적으로 흩어져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통의부 단원들은 이제 이리동척지점 습격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걸맞는 조직력과 준비를 갖 추어 나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에게는 나석주처럼 동척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조차 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경성지점 동척 습격 사건으로 그동안 충분히 학습하고 예상하며 독립투사들을 감시해왔던 일제 경찰의 주도면밀한 감시망 때문일 수도 있었다. 3) 전북폭발탄사 건 의 발각과 체포 및 재판과정 박영관은 1928년 6월 6일, 당시 은거하고 있던 전남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 집에에서 체포되었다. 재판 판결문에는 주소가 삼계리로 나오지만, 그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체포된 곳은 두 월리이다. 뒤에서 다시 서술하겠지만, 그가 이곳 장성군 삼서면에 정착하게 된 것은 목포에서 인연 을 맺은 오석완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집과 바로 이웃한 곳이 오석완의 집이 있던 삼서면 수양리였다. 이 두 사람이 6월 6일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장소에서 체포된 사연과 조인현을 비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