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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7회) • 전북 익산의 만세시위(1) 103 할 수 없자, 일본군 수비병의 응원을 요청했다. 수비 병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했으나, 시위대는 흩어지지 않고 더욱 기세를 높였다. 헌병과 수비병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현장에서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했으며, 중심인물 12명이 체포되었다. 시위는 자정이 넘은 0시 45분에야 끝이 났다. 전라북도 도장관 이진호는 4월 9일 보고에서 사망 자 명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날 시위에서 즉사자로  박도현(朴道玄), 55세, 익산군 익산면 대장촌리  문교관(文敎官), 42세, 오산면 오산리 주모자   강경춘(姜京春), 34세, 김제군 만경면  박양문(朴良文), 16세, 김제군 만경면   서공유(徐公有), 29세, 익산군 북일면 현영리-부상  후 사망 부상자 십수 명이 있는 듯 하나 상세한 것은 불명” 판결문이 전하는 또다른 진실 김치옥 등 4명 판결문에는 더 상세한 내용이 나 온다.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 야소교회 집사인 김치옥(金 致玉)은 신도들과 함께 1919년 4월 4일 익산면 이 리 장날을 이용하여 정오 12시 30분 경 이리시장 에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문용기(文容基), 박성엽 (朴成燁)은 붉은색으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커 다란 깃발을 준비하여 앞세우고, 전창여(全昌汝)와  박동근(朴東根)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대중에게 배 포하였다.” 이처럼 익산군에는 독립선언서가 일찍 전해졌고, 3월 9일 여산면에서 첫 시위가 있었다. 이어서 금마 면 익산시장에서는 보름 동안 장이 설 때마다 3연속 만세시위가 이어지는 진풍경도 연출되었다. 그러다 4월 4일 익산면 이리장터에서 1천여 명의 대규모 만 세시위가 일어났다. 일본군의 발포, 시위 현장에서 피살당한 문용기의 순국에 대해 다음 호에서 이어진 다. (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 임 했고,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금마장터 만세시위 터(공터 주변이 시장, 왼쪽이 우시장, 이상 독립기 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