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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6회) • 평북 철산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3) 103 이 뛰었다. 1919년 1월 28일자 『매일신보』도 윌슨의 14개 조 원칙을 보도했다. “때가 왔다! 민족의 수치를 씻을 때다!” 이의현 등 선배 청년들이 송시준(宋時俊, 21세, 농 업)에게 독립만세 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4천년 역사의 이 강토에 살아온 청년으로서 어 찌 몸을 숨기고 반대하겠습니까!” 하며 기꺼이 동참 했다. 유정동의 이의현, 송시준, 용산동 농민 김윤옥(金 潤玉) 등은 3월 5일 차련관 장날에 독립만세 시위운 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오후 1시가 되자 이들은 태 극기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차련관 시 장에서 만세시위를 개시하였다. 처음 2천 명이던 시 위대는 독립만세 소리에 3천 명으로 불어났다. 주재소 순사들은 놀라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만세 시위는 오후 4시까지도 계속되었다. 부근의 선천경 찰서에서 11명의 지원 순사대가 도착했다. 보병 77 연대 하사 이하 8명도 투입되었다. 관공서와 민가 1 곳이 파괴되고, 34명이 검거되었으나 사상자 없이 끝났다. 3월 7일 철산면 철산의 명흥학교 교사 유봉영(劉鳳榮, 22세)은 서 울에서 발신인 없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등사한 독 립선언서와 뒷면에 철산의 봉기를 촉구하는 글이 적 혀 있었다. 유봉영의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철산에 는 2월 28일 철산면 중부동 철산 시장 잡화상 김영 락(金永洛, 22세)에게 독립선언서 20여 매가 그 전 에 전달되었다. 김영락은 백량면 도암리 정병호(鄭炳 鎬, 26세)에게 배포를 부탁하며 3월 7일 장날 만세시 위를 계획했다. 그는 사립 명흥학교(明興學校) 교사 인 안태영(安泰英, 26세), 중부동의 안봉국(安奉國, 23 세)·미곡상 심치경(沈致璟, 25세) 등의 기독교인, 정구 석(鄭久錫) 등의 천도교인, 김정찬(金鼎贊)·정익(鄭翊) 등의 일반 주민 대표들과 연락해 준비를 진행했다. 동부동 유봉영의 집은 철산 시위 준비 본부가 되어 3~4차례에 걸쳐 비밀회의를 열었다. 3월 6일 안태 영, 김영락이 독립선언서를 전해 준 선천 방문 후 돌 아와 외쳤다. “조선의 독립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날 밤 안태영, 김영락의 지휘하에 동부동의 이발 사 이재근(李載根, 28세) 이발소에서 안봉국, 김태명 (金泰明, 잡화상, 25세)이 선언서를 등사 인쇄했다. 명흥학교 교장 심치규(沈致珪, 38세)도 광무황제 (고종) 추도식 참석을 약속하며 시위를 지원했다. 3월 7일, 정오가 되자 철산 읍내에서 광무황제 추 도식이 열렸다. 1월 21일 서거한 광무황제의 추도회 는 군중을 모으기 위한 명분이었다. 추도회가 끝났을 때 장터에는 각 교회 교인들, 장꾼과 일반인이 약 5 천 명이 모였다. “조선 독립을 위해 거리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3 · 1운동은 “만세”라는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방법 으로 대중을 이끈 것이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 이원겸(李元謙), 안봉국 등이 선언서를 배포했다. 박응수, 심치경, 김태명 등은 수천 명 군중 앞에서 독 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이 호응하여 산천이 떠나갈 듯이 독립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군내 여러 교회 교 인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앞장섰다. 시위대는 대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