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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8집|2012 I S S N  1 7 3 9 - 4 1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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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8집 | 2012 편집위원 서용선 작가, 전 서울대학교 회화과 교수 유건 시상건축 대표 이인범 상명대학교 조형예술학부 교수 『유영국 저널』제8집 발행일 2012년 11월 11일 발행인 윤명로 편집인 이인범 발행처 재단법인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14-44 Decks빌딩 tel.02 561 6090 제작 • 판매 도서출판 그림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래미안 APT 2차 104-063 편집진행 김주원 표지 및 로고디자인 신명우 편집디자인 김보경 ISSN 1739-4112 정가 25,000원 ⓒ 2012 Yoo Youngkuk Art Foundation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필자 및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의 동의 없이 무단전재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의 문예진흥기금을 보조받아 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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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특집 1973-1978 유영국의 활동 5 김기순의 기억 13 자료 전시 관련 자료 신문 • 잡지기사 영인 제8집|2012 해석과 전망 연구 98 유영국의 회화: 동양의 예술관을 통한 서양미술의 수용/정하윤 114 돈구리카이와《제2고보전》: 미술교사 사토우 쿠니오의 활동배경/ 이우치 가츠에 118 유영국의 1970년대 작품에 대한 단상:  아방가르드 VS = 전통?/김주원 124 자유정신과 자연을 향한‘랩소디’/이인범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활동 154 전시 157 10주기전 162 작품 거래 164 도서발간 • 특별강연 165알림 167편집후기 기억속의 유영국 큐레이터와 비평가의 기억 134 박천남 148 이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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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8집 | 2012 1973-1978 유영국의 활동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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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기순의 기억 이번 호에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화가 유영국의 활동에 관한 부인 김기순(1920- ) 여사의 구술채록을 발췌하여 싣는다. 유영국은 환갑을 맞이하는 이시기에야 생애 처음으로 작품을 판매했으며 약수동 시절을 마감하고 등촌동으 로 주거지를 옮겨 자연풍경을 일상생활 속에서 벗삼기 시작했다.  이 구술은 방배동 자택에서 2004년 7월 28일과 8월 28일 양일에 걸쳐 이인범(상명대 교수)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 에서 발췌하였다.  이하 김기순 여사는‘김’, 이인범은‘이’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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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8집 | 2012 작품 판매에 관한 첫 기억 이 상경 후의 활동에 대해 말씀 여쭙겠습니다. 김 상경해서도 돈 벌려고 애썼어요. 근데 돈을 못 벌었어요.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그 때 상경해서 그림 이라 고 팔아본 게 61살인가에 처음 팔아봤으니까요. 75년에 현대화랑에서 전람회 했을 때, 그 때 처음 팔아보구 요 . 그 때 이병철회장이요 미술관을 한다고 모든 화가들한테 그림 한 장씩, 한 장에 100만원씩 다 하셨어요. 그랬는데, 그 때 그림… 저 미술관을 하신다니까, 한국에 미술관이 생기는 게 이병철 씨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느냐고, 참 높이 사야 된다고… 아마 이 그림은 내가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골랐을 거예요. 그래서 모든 그림이 다 100만원인데. 그 땐 100만원이 아니래도 내놓을 수가 있다고…그러면서 그 때 최순우 씨라는 분이 오셨어요. 그림 팔면 그 땐 다 어려울때니까요. 100만원이면 그 중 30만원은 그 분을 줄까하고 생각하고 계셨거든요. 물론 최순우씨는 이병철씨가 어떻게 대접할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가 다 어려울 때 가난하니까. 그림 뭐… 미술관한다면 100만원 아니라 50만원이라도 내가 내놨을 텐데… 그러면 서30만원 드리려고 했는데. 이병철 씨가 그 그림을 보더니요, 추상화도 이만하면 괜찮군 그러셨대요. 최순 우 씨가 와서. 그래서 그 말이 너무 기뻐서, 왜 기쁘냐면 그 때는 추상화를 그림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이병 철 씨는 그 때 고미술이라는 데 대해서 조예가 아주 깊으신 분이예요. 그리고 추상화는 생각도 안하던 분이 니까 추상화도 이 정도면 괜찮군 그랬다는 그 한마디가 너무 기뻐서요, 최순우 씨한테 그림을 한 장 줬다니 까요. 그 때 유영국 씨는 돈 보다는 그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랬어요. 돈으로 드리면 어 떻겠느냐고…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고. 돈은 써버리면 그만이지 그림이 더 중요하다고… 그러면서, 남 한테 그림을 거져 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한 장 줬어요. 그 때 30혼가… 그런데 최순우 씨 돌아간 다음에 그 부인이 금방 현대화랑에 가져오셨더래요. 산 1975년, 캔버스에 유채, 61x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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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내놓으셨죠. 김 네. 그래도 유용하게 썼으니 다행이에요.  이 그…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1년도 안 되가지고… 김 네, 그렇게 하셨데요… 그 때 돈으로 드렸으면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됐는데요. 우리 집 양반 은 돈보다는 그림이 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30만원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물론 돈이 중하죠. 그 땐 돈이 귀할 때니까. 30만원엔 댈게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그림 30호가. 그러니까 무슨 소릴 하느냐고 돈보다는 이 게 더 얼마나 큰 건데… 그러면서 그림을 줬어요. 그런데 그림은 절대 남을 거져주면 안된다는 게 또 지론이 에요. 거져받은 그림은 다 우습게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한데요. 서울 얘긴 선생님도 이미 다 아실거구요, 내 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집안에서 조금 일어났던 일뿐이고, 나에 대한 얘기라니까 내가 돈 벌려고 얼마나 허덕 거렸나 하는 그 얘기죠. 돈 되는 일이 뭔가 하고 갖은 생각 다해봤어요. 양조장은 자꾸 부정사건이 나서 남들 이 자꾸 해먹거든요. 맡긴 사람들이요. 그러니 양조장은 줄어들어 갈게 뻔하구.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 겠다… 먼 날을, 10년이라는 걸 생각하면은요. 그러니까 내가, 그 땐 젊었을 때니까 지금에서부터라도 벌기 시작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벌라구요 갖은 생각 다 해봤어요. 4자녀의 유학과 가족 경제 사정 이 자제분들 말씀이 나와서 여쭙는데 학교 보내신, 그 유학 보내신 게 언제 쯤이셨어요? 김 큰 딸이29살에 갔으니까요. 연도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결혼을 시켜야 되는데 유학을 간다고 그래서… 이 몇 년 동안 가신 거죠? 김 그 때 템플 유니버스티가 몇 년입니까? 한, 2-3년쯤 되죠? 이 한73년도 정도 되겠네요? 김 그 때 장학금을 탔던 것 같아요, 걔가. 간다고 그래서 나는 유학을 보내지 말고 그냥 한국에 있다가 결 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가 결혼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이런 말하면 참 우습지만요. 결 혼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제가 하겠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구요, 그래서 가게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애들 이 결 혼 안하는 것에 대해서 나처럼 고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결혼 하면 물론 좋았겠죠. 그런데 결혼 안 해도 자기는 할 일이 있고 길이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는 그것 때문에 항상 마음 조리구요. 이 당시에는 사모님께서는 마음을 조리셨군요. 김 그럼요, 에미니까 마음 졸이고… 그리고 그 때는 여자 애들이 술을 별로 안 먹을 때에요. 그런데 혹 가 다가 아버지가 포도주 잡수면서 마시라고, 괜찮다고… 그래서 딸을 술을 먹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포도주가 무슨 술이냐고… 살다보면 술도 먹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내버려두라고. 아마 딸이 혼자 있으니까 그랬는지 알 수 없죠. 그것이 걔들이 유학 갔다 왔을 땐가… 대학 졸업했을 땐가. 내버려 두라고 뭐 그렇게 빡빡하게 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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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8집 | 2012 고… 그래서 그 땐 좀 당황했지만요. 나중에는 이해가 갔어요. 살다보면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싶 을 때 가 있을 거라 그래요.  이 한꺼번에 여러 분이 유학을 가게 되시지 않았어요? 김 네. 맨 처음에 진이가, 큰 아들이 먼저 가게 됐어요. 그래서 걔가 필라델피안가 글루 가게 됐는데, 참 그 게 또 묘해요. 그 아이도 장학금을 조금 받았나 봐요. 그런데 사실은 버클리에서 입학허가가 나왔는데요. 맏아들 이라. 애들이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모가 그거 다 공부시킬려면 부모가 힘들 거라고. 그래서 장학금을 조 금 주는 그곳으로… 그건 참 미안해요, 아들한테요. 그 다음에 거기로 갔기 때문에 아마 큰 딸이… 템플 유니 버스티가 필라델피아에 있나봐요. 그래서 거기로… 이 아, 같이… 김 아뇨, 그래서 거기로 신청해서 글루 가게 된가 아닌가… 한 고장이니까요. 그 다음에 또 자야 떠나구요.  그리 고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심근경색 앓아서요, 아주 너무도 힘들구요, 그 때 경제적으로 조금 힘들었어요 . 그 래서 걔는 한 해 쉬고 그 이듬해 가게 됐어요. 이 등촌동으로 이사가기 전에 가신 거죠? 김 등촌동으로 이사가던 해에 갔다 왔어요. 그래서 넷을 다 보내게 됐어요.  이 70년대에 쉽지 않은 일이셨을 것 같아요. 김 네. 그 땐 혹 가다가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쉽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학비를 제대 로 대 준 것은 밑에 아이 건이구요. 자야도 물론 학비를 댔지만요. 그런데 자야가 나중에 미국 갔다가요 , 미 국에 패션을 배우러 갔는데요. 걔가 유난히 손에 땀이 많이 나요. 그런데 도저히 그걸 못하겠더래요. 그 래서 나중에 불란서로 갔어요.  이 그러니까 처음엔 패션을 배우러 가셨군요? 김 네.  이 그리고 전공은 뭐 하셨어요? 유자야 선생님이. 공예쪽이었나요? 김 공예에 속했겠죠. 그래픽도 아니고… 직조요.  이 아, 파브릭이요? 김 아니요. 하여튼 디자인인데요.  이 직물디자인을 하셨군요. 김 네. 하여튼 이름이 좀 달라서 금방 생각이 안나요. 이 그 양조장을 시작하신 것은 1951년3월 달인가에, 1.4 후퇴 때 바로 시작을 하셨다고 하셨구요. 김 네. 그 아이가 태어난 다음이니까요. 이 그리고 나서 그만 두신 것은 정확하게 언제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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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 여기 이사 오면서요.  이 방배동에요? 김 아니, 약수동에요. 아, 아주 그만둔 거요? 그러니까 등촌동에 있을 땐데요 이 등촌동으로 이사 가시고 나서도. 김 아, 그럼요. 등촌동에 이사 가서도 꽤 오래했죠. 이십 몇 년을 그 양조장을 했으니까요. 이 이십 여 년이었군요. 김 그 심근경색 앓기 전에 그만뒀어요. 아, 그건 약수동 때죠? 아마 심장병인가 봐요.  이 아, 심장병이요? 김 네. 심장수술하기 전인가 봐요. 이 그러니까 그러는 과정에서도 처음에는 처음엔 선생님께서 직접 직영하실 때는 굉장히 번성하셨지만 그 이후 에 맡기셨을 적에는 지지부진 하셨다면서요? 김 아무래도 주인이 없으니까요. 이 그 이후에도 줄장 그렇게 지지부진했어요? 김 아뇨. 매달 한 번씩 가셨어요. 매달 가시면 생활비는 충분히 나왔겠죠. 그런데 나중에요 고관절이 나빠 지셨 어요. 그런데 그 때 서울에서는 수술할 수가 없었어요. 연세대학을 가니까. 2, 3년만 참으면 미국에서 수술 산 1970년대, 캔버스에 유채, 134x13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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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8집 | 2012 하는 선생이 나오던지 수술기술이 도입된다고. 그래서 75년에도 양쪽에 목발을 짚고 다니셨거든요. 그런데 도 한 달에 한 번씩 죽변에를 다니셨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심장병 수술하기 전에 아마 팔았나봐요. 아주 싼 값에 흥정도 안하고.  이 그래도 그 양조장 말고 사모님께서 운수업도 조금 손을 대셨었지만… 김 그게 한 5년인데요 그것도 생활에 보탬이 조금은 됐어요. 양조장에서 그렇게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송금도 또 안 해오고 자꾸 아프시니까요. 심근경색으로 아프고 그럴 적에 양조장에 내려가시지도 못하고 저도 갈 수 도 없구요. 그럴 적에는 주인도 없는 자리니까 오죽 편해요. 장부가 거진 다 외상으로 돼있어요. 돈은 다 나 눠가졌겠죠. 그런데 제가 만약에 그 양조장을 돈 때문에 매달렸다면요 애들은 누가 봐줄 사람도 없구요, 남 편은 또 누가 봐줍니까. 그래서 양조장은 전혀 내려가지도 않고 그 사람들한테만 맡기는데, 그 양조장이라는 게 또 먹는장사지 않아요. 물 장사죠. 물을 뭐 한 말 떴다고 하면 한 말 돈이 거져 나오나까요. 이 예. 김 그러니까 도수도 제 마음대로 올렸다 내렸다 했을 거구요. 아마 제대로 운영도 못했을거에요. 그러니 까 팔 적에 식구들이 이것 덕택에 식구들이 오래 먹고 살았으니까 그거 제 값 받을 생각도 안하고 누가 얼마 면 어 떻냐 그러니까‘아 그러라고’. 한마디에 그냥 팔아버렸어요.  이 그러니까 부업은 그러니까 그것 말고는 운수업 하신 것 말고는 그 밖에는, 이외에는 안 하셨어요? 김 예. 뭐래도 집에 있으면서 할 것을 여러 가지 생각했었는데요. 집에 있으면서 해도 정신이 헷갈려서요.  저 양 반도 내가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 신경쓰구요. 그 때 애들은 또 국민학교서부터 중학교가 입시예요. 그러 니까 애 넷이 다 입시에 매달려야하고. 또 제일 어려웠던 것이 일하는 사람한테만 맡겨 놓으면 저 양반이 식 사가 아침, 낮은 몇 시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데 그걸 못 맞춰요. 그런데 이 양반은 시간을 정해 놓구요. 12시에 식 사 하면 몇 분 동안식사하고 내가 30분 동안 누웠다가 좀 정신 차렸다가 다시 일어나서 몇 시에 뭘 시작한 다는 것을 아주 기계같이 정해 놓고 매일 생활을 하는데, 아줌마들이 그걸 못 맞추니까요. 그러면 본인은 짜 증도 나구요, 일에 차질도 줄 것이구요, 그래서 조금 버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안하구요. 그리고 등촌동에 이사가서는 그림도 조금 팔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애들을 건이와 자야를 조금, 진이는 일 푼도 돈 대주지 않았어요. 올 때 천 불 보내준 게 다예요.  이 벌어서 다니셨어요? 김 벌기도 하고 장학금도 받고 그랬겠죠. 걔는 자랄 적에도 어디서 자란 지도 모르게 혼자 공부하고 혼자 제일 챙기고… 그리고 앓지도. 어려서는 조금 약했는데요, 커서는 제가 운동하구요 저 혼자 자란 아이예요.  그래 서 항상 미안해요. 그 반면 건이는 과외공부 선생도 대학생을 오기도 하구요. 딸 둘은 그 때는 과외공 부 안 시킬 때라 그렇게 살았지만 애들도 봐줘야겠는데 아무래도 한 쪽을 포기해야 되겠죠. 그래서 돈을 포기 했어 요 . 그런데 다행히 그림도 조금 팔리기 시작하고 또 양조장 팔은 돈도 조금 있었으니까 최대한 절약하 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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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 그런데 운수업도 60년대 말에 그만 두셨고 선생님 작품이 팔리기 시작한 것도 70년대 후반이고, 80년대 초 가 그렇게 생활이 편치 않으셨을 것 같아요. 김 네. 편치 않았죠. 그런데 병원에는 자꾸 입원하시고 가시게 되고. 그러니까 있는 돈 가지고 또 차도 팔 게 되 고 . 그런데 차 판 돈도 아주생각해서 유용하게 썼던 것 같아요. 화실도 조그맣게 하나 뜰에다가 짓구요. 장 래를 생각해서 그걸로 땅도 조금 사 놓구요. 돈도 조금 남기구요, 양조장 팔은 돈 하구요. 그래서 한 달에 얼 마를 쓸 것인가를 생각하구요. 거기서 대개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애들 공부 시킬 것은 제대로 시켜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먹는 거는 또 돈이 적으니까 이렇게 드시라고는 못했어요. 작품 경향의 변화와 슬럼프 극복 이 현대작가초대전이란 것도 있었잖아요. 조선일보사에서 한 것. 근데 선생님이 첫 번째에는 안 들어가셨어 요 . 김 예. 이 그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들어가셨을 법 한데요. 김 안 맞았으니깐 그러셨겠죠. 이 1958년도 봄에는 두 번째가 열렸는데 그 때는 참여를 하셨어요. 그 현대작가초대전이 열릴 때는 가보셨죠? 덕수궁미술관에서 했던 거요. 김 그렇지요. 전람회는 다 가봤으니깐요. 근데 가보고 느낀 것은 집에서 조그만 방에서 그리신 거하고 그 런 넓 일월도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05x1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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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8집 | 2012 은 공간에 가서 헤쳐 놓고 또 다른 선생님들 그림도 있고 하니깐 훨씬 느낌이 달랐어요. 그리고 뭘 그리 시려 는 건지 잘 알진 못하지만 이게 뭔가 내가 어떤 때는 물어봤어요. 근데 그림이란 게 한참 그리다보면 벽 에 부 딪히나 봐요. 그럼 한동안 그걸 뚫고 나가려고 애쓰셨던 거 같아요. 그리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는 다시 처음서부터 시작해요. 처음 하는 것처럼 한다고 그러셨어요. 이 처음시작으로 돌아가서 다시요? 김 네. 다시요. 벽에 부딪히실 때마다 그러셨어요. 이 선생님 그림 중에서 이미 그렸던 그림을 다시 똑같이 그린 건 아니지만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작 품도 있으시다구요. 김 있지요. 그건 벽에 부딪혔을 적에 그걸 뚫고 나가려고 갖은 애를 쓰시면서 처음 시작한거처럼 다시 해보 시고 거기서 다시 헤쳐나가시고 수없이 그런 걸 반복하셨어요. 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작품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해서 개인의 작품 때문에 괴로워하시고 벽에 부딪혔다 는 생 각을 하신 게 언제세요? 김 그런 말을 입으로 내서 하신 적은 없는데. 등촌동에서 그런 말을 하셨던 거 같아요. 하다가 나도 벽에 부 딪힐 때가 있다고.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을 한대요. 그러고 뚫고 나가고 가다보면 또 벽 에 부 딪힌대요. 그리고 예를 들면 일본은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잖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외국도 가서 많은 것을 그려오고 거기 갔다 온 얘기들도 하구요. 그리고 주위에 같은 경향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이 많 아서 같이 얘기하고 보고 그러면 헤쳐 나가기가 훨씬 쉬운데 여기서는 나 혼자 벽에 부딪힐 적에는 어 떻게 할 줄 모르고 다시 돌이켜보고 그런다고. 답답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데리고 그런 얘기를 하셨겠 죠 . 이 1960년대 전후에 나오는 작품들이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 들잖아요. 물론 한창 젊으실 때니까 그 러시겠지만. 김 그러구 나중에 1970년대에 그린 그림은 그때하고 다르지 않나요? 이 경향이 다르죠. 김 아마 앞으로는 이런 그림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바꾸신 줄은 알 수가 없어요. 하여튼 그림을 바꾸셨 으니 까요. 바꾸셨는데 처음 바꿀 적에 아주 힘드셨나 봐요. 그때 또다시 하고 또다시 하고 그러셨어요. 이《상파울로비엔날레》에 보냈던 작품이 석 점이라 그러셨잖아요? 80호라 그러셨나요? 김 100호에요. 80호 그림은 일생에 한 점인가 두 점밖에 없어요. 80호는 1975년에 현대화랑에서 <일월도>라 는 걸 그리셨어요. 산하고 해가 있는 것 같은 그림을 그리셨는데 그걸 일월도라고 붙이시더군요. 그런데 그 걸 그때 홍라희 씨가 사가셨어요. 그게 80호였던 거 같아요. 그 후에 또80호 한 점이 있었다고 그러는데 어 떤 그림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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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자료 1. 전시 관련 자료 《한국현대화가 100인전》1973. 07. 05-07. 2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제5회 유영국작품전》1975. 11. 14-11. 22, 현대화랑, 서울 《제6회 유영국작품전》1976. 04. 06-04. 11, 신세계미술관, 서울 《제7회 유영국작품전》1977. 10. 21-10. 29, 진화랑, 서울 《서울갤러리 개관 기념전》1978. 08. 12-08. 21, 서울갤러리, 서울 2. 신문·잡지 기사 영인 자료목록 《유영국 작품전》(제5회-제7회) 《한국현대서양화대전》 《6월 초대작품전》 《서울갤러리 개관 기념전》 《신사실파 회고전》 유영국 작가론 및 기고 잡지 표지 게재 도판 제21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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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8집 | 2012 《한국현대화가 100인전》(1973. 07. 05-07. 2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 전시 관련 자료 카탈로그 표지 앞면 카탈로그 내지의 머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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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카탈로그 내지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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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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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5회 유영국작품전》(1975. 11. 14-11. 22, 현대화랑, 서울) 카탈로그 표지 앞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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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8집 | 2012 카탈로그 내지 평문과 사진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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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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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8집 | 2012 위/아래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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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위/아래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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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8집 | 2012 《제6회 유영국작품전》(1976. 04. 06-04. 11, 신세계미술관, 서울) 카탈로그 표지 앞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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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카탈로그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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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8집 | 2012 카탈로그 내지 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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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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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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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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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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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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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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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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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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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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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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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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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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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카탈로그 내지 작가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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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8집 | 2012 카탈로그 내지의 출품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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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제7회 유영국작품전》(1977. 10. 21-10. 29, 진화랑, 서울) 카탈로그 표지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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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8집 | 2012 카탈로그 내지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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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카탈로그 내지 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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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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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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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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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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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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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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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8집 | 2012 카탈로그 내지의 작가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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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카탈로그 내지의 진화랑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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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제8집 | 2012 《서울갤러리 개관 기념전》(1978. 08. 12-08. 21, 서울갤러리, 서울) 카탈로그 표지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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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카탈로그 내지의 출품작가 및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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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8집 | 2012 카탈로그 내지의 작가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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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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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8집 | 2012 카탈로그 게재 유영국 작품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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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신문·잡지 기사 영인 자료목록 제5회《유영국작품전》(1975. 11. 14-11. 22, 현대화랑) • 「전시회, 유영국 작품전」『경향신문』, 1975. 11. 1 • 「유영국 <산> 작품전 14일부터 현대화랑」, 『매일경제』,  1 975. 11. 14 •이흥우, 「유영국 작품전, 강렬한 색채에 담은 자연」,  『조선일보』, 1975. 11. 14 • 「유영국 개인전, 현대화랑서 22일까지, 어두운 화면 탈피,  소품 40점」, 『중앙일보』, 1975. 11. 15 • 「유영국 추상전」, 『동아일보』, 1975. 11. 17 • 「추상화업 40년 정리하는 유영국 화백」, 『독서신문』, 254호,  1975. 11. 23 •이경성, 이흥우, 「<이달의 미술> 거시적 세계서 부드러움의 원숙기로(유영국전)」, 『조선일보』, 1975. 11. 29 • 「구체적 이미지와 서정성」, 『공간』, 1975. 12. p.82 제6회《유영국작품전》(1976. 04. 06-04. 11, 신세계미술관) • 「유영국 작품 초대전」, 『중앙일보』, 1976. 04. 05 • 「유영국 작품 초대전」, 『조선일보』, 1976. 04. 09 제7회《유영국작품전》(1977. 10. 21-10. 29, 진화랑) • 「미술-유영국 유화전」, 『동아일보』, 1977. 10. 26 • 「유영국 유화 개인전」, 『경향신문』, 1977. 10. 27 • 「유영국 유화전」, 『독서신문』, 351호, 1977. 11. 06 • 「화제와 소식: 유영국 유화전」, 『공간』, 1977. 11, p.158 • 「시즌 하이라이트」, 『계간미술』5호, 1978, 봄 《한국현대서양화대전》(1977. 03. 14-04. 02, 국립현대미술관) • 「현대서양화대전」, 『동아일보』, 1977. 03. 14 《6월 초대작품전》(1977. 06. 21-06. 30, 희화랑) • 「신사실, 모던아트 화가들의 근작」,『공간』,1977, 7. pp.97-98 《서울갤러리 개관 기념전》(1978. 08. 12-08. 21, 서울갤러리) • 「문화단신-서울갤러리 개관전」, 『동아일보』, 1978. 08. 11 《신사실파 회고전》(1978. 09. 22-09. 30, 원화랑) • 「내주의 행사 : 전시회-신사실파 회고전」, 『경향신문』,  1978. 09. 23 • 「신사실파 회고전 재개 25년 만에… 원 화랑 개원기념」,  『중앙일보』,  1978. 09. 26 • 「신사실파 회고전」, 『동아일보』, 1978. 09. 27 • 「전시회-신사실파 회고전」, 『경향신문』, 1978. 09. 27 유영국 작가론 및 기고 •박래경, 「아뜨리에 탐방-유영국」, 『화랑』4호, 1974. 여름,  pp.29-35 •유준상, 「빛의 구조를 좆아」, 『화랑』9호, 가을, 1975, pp.2-10 •장욱진, 「고집으로 지내온 화가 영국」, 『화랑』11호, 1976, 봄,  pp.44 •유영국, 「언제고 스스럼없이 자네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 욱진」,  『화랑』11호, 1976, 봄, pp.44-45 •문책 기자, 「유영국, 산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어」,  『공간』, 1977. 11, pp.34-35 잡지 표지 게재 도판 • 『화랑』, 7호, 1975. 봄 • 『독서신문』, 317호, 1977.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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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8집 | 2012 • 『계간미술』, 4호, 1977. 가을 • 『공간』, 1978. 2 / 「표지의 말」『공간』, 1978. 2, p.105 • 『신동아』1968. 5 • 『신동아』1975. 11 제21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문학 박두진 씨 미술 유영국 씨 음악 김순열 씨」, 『경향신문』, 1976. 06. 29 • 「예술원상 수상자 문학 부문 박두진 씨 미술 부문 유영국 씨 음악 부문 김순열 씨」, 『매일경제』, 1976. 06. 29 • 「21회 예술원상 수상자 결정(문학 박두진 미술 유영국 음악 김순열 씨)」, 『동아일보』,  1976. 06. 29 • 「예술원상 영광의 세 얼굴-문학 박두진, 미술 유영국,  음악 김순열」, 『경향신문』,  1976. 06. 30 • 「올해 학술원상 수상자 결정-문학=박두진씨, 미술=유영국씨,  음악-김순열씨」, 『조선일보』, 1976. 06. 30 • 「제21회 학·예술원상 시상식-차상원, 박두진 교수 등 5명 수상」, 『동아일보ㅍ,  1976. 09. 18 • 「학·예술원상 5명에 시상」, 『경향신문』, 1976. 09. 18 • 「예술원상 탄 유영국」『화랑』13호, 1976, 가을, pp.72-73 기타 • 「한묵 판화전 열어, 공간 사랑, 동료들손으로 36점 전시」,  『동아일보』, 1973. 10. 03. • 「스케치, 한묵판화전」, 『동아일보』, 1973. 10. 15 •박고석, 「모던아트 시절」, 『화랑』2호, 1973. 겨울, pp.42-43 • 「배동신 수채화전」, 『동아일보』, 1973. 06. 25 • 「미술관 행사와 활동의 범위 | 현역작가 백인 전을 보고 |  임영방 <서울대 미술대 교수 철박>」, 『중앙일보』, 1973. 07. 18 • 「문화단신, 대전산강화랑개관一주년 기념전」, 『동아일보』,  1974. 04. 18. • 「산강 화랑 초대전」, 『중앙일보』, 1974. 04. 18 • 『화랑』, 4호 발간, 『경향신문』, 1974. 06. 15 • 「현대미술가 인명록 (상)」, 『화랑』, 5호, 1974. 가을, p.87 • 「동면깬 화랑 봄맞이 전시」, 『동아일보』, 1975. 02. 24 • 「현대화랑 개관 5주년 기념전 99인 작품 전시… 22일-30일」,  『경향신문』,  1975. 03. 18 • 「원로·중진 99명 출품」, 『동아일보』, 1975. 03. 22 •오광수, 「전시, 활짝, 위축 벗고 활기 되찾아 3월 화랑가」,  『경향신문』,  1975. 03. 31 • 「공간지 미술대상 창간백호 기념 제정」, 『경향신문』,  1975. 07. 15 • 「공간미술대상 마련」, 『동아일보』, 1975. 07. 16 • 「공간미술대상 제정 공간 지령백호기념」, 『화랑』, 9호, 1975,  가을,  p.90 • 「원로들 잇단 개인전| 풍성할 가을 화단」, 『중앙일보』,  1975.09.12 • 「새 방향 찾는 화랑가」, 『독서신문』,245호, 1975. 09. 21 • 「11월30일부터 김환기 화백 회고전」,『매일경제』,1975.10.09 • 「이달의 문화 행사」, 『중앙일보』, 1975. 11. 01 • 「(1)‘75 비망록|비싸진 그림 값… 전시회 러쉬」,『중앙일보』,  1975. 12. 08 •최홍근, 「그림값」, 『계간미술』3호, 1976, 봄, p.179,p.183 • 「조용히 막 여는 새해 화랑가」, 『중앙일보』, 1976. 01. 27 •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 03. 17 • 「국전운영위원 23명 위촉」, 『중앙일보』, 1976. 03.17 • 「4대 국전 운영위원 23명 위촉」, 『경향신문』,1976. 03. 17 • 「문화행사-유영국 작품전(6-11, 신세계미술관)」, 『매일경제』,  1976. 04. 01 • 「문화계산책-유영국 작품전」, 『매일경제』, 1976.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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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진우회 회갑전」, 『경향신문』, 1976. 11. 02 • 「진우회전」, 『동아일보』, 1976. 11. 04. • 「151명 초대… 한국서양화대전」, 『중앙일보』, 1977.02.08 • 「서양화 초대전 신세계미술관」, 『경향신문』, 1977. 02. 18 • 「미술계에 국전개혁론」, 『동아일보』, 1977. 04. 30 • 「그림값 작년보다 30%선 올라」, 『매일경제』, 1977. 06. 14 • 「문화계 산책」, 『매일경제』, 1977. 06. 21 • 「원로 5인전 희화랑서」, 『경향신문』, 1977. 06. 21 • 「화가 5인 초대전 21-30일 희화랑」, 『중앙일보』, 1977.06.20 • 「6월 초대작품전」, 『동아일보』, 1977. 06. 23 • 「미술-실명예방협 미전」, 『동아일보』,1977. 09. 19 • 「실명예방 자선미술전 |19-23일 출판문화회관」, 『중앙일보』,  1977. 09. 20 • 「『계간미술』가을호 출간」, 『중앙일보』, 1977. 10. 14 • 「동아포우스트-유영국 유화전」, 『동아일보』, 1977. 10. 20 • 「가볼만한 곳-서양화가 유영국 유화전」, 『경향신문』,  1977. 10. 22 • 「미술」, 『중앙일보』, 1977.12.16. •오광수, 김윤수,「전시회 리뷰」, 『계간미술』5호, 1978, 봄,  p.158, p.162 • 「현대화랑 8돌 기념 전시 작고·재외 화가 등 37명」,  『경향신문』,  1978. 03. 27 • 「유영국·김봉태·유강렬·허민씨 회화작품 8점 기증 국립현대미술관에」,『중앙일보』, 1978. 05. 20 • 「국내뉴스」, 『화랑』20호, 여름, 1978, p.94 •이일, 「한국추상미술을 진단한다」, 『계간미술』6호, 1978, 여름, pp.61-64 • 「한국의 추상화가 10인」, 『계간미술』6호, 1978, 여름 •이경성, 「인기화가 베스트 10」, 『화랑』20호, 1978, 여름 • 「서울「갤러리」개관 기념전 」, 『중앙일보』, 1978. 08. 11 • 「화랑「서울갤러리」개관 기념전」, 『경향신문』, 1978. 08. 11 • 「서울갤러리 개관전」, 『공간』, 1978. 9, p.117 • 「눈먼 사람 돕기 자선 미전 열어」, 『중앙일보』, 1978. 09. 12 • 「열 사람의 화가, 평론가들 선정」, 『동아일보』, 1978. 09. 19 • 「서양화 애장품전 | 도상봉씨 유작 등」,『중앙일보』, 197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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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제8집 | 2012 제5회《유영국작품전》(1975) 「전시회, 유영국 작품전」『경향신문』, 1975. 11. 1 「유영국 < 산> 작품전 14일부터 현대화랑」, 『매일경제』, 197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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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흥우, 「유영국 작품전, 강렬한 색채에 담은 자연」, 『조선일보』, 197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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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제8집 | 2012 「유영국 개인전, 현대화랑서 22일까지, 어두운 화면 탈피, 소품 40점」, 『중앙일보』, 1975. 11. 15 「유영국 추상전」, 『동아일보』, 1975.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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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추상화업 40년 정리하는 유영국 화백」, 『독서신문』, 254호, 1975. 11. 23 「구체적 이미지와 서정성」, 『공간』, 1975. 12.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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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제8집 | 2012 이경성, 이흥우, 「<이달의 미술> 거시적 세계서 부드러움의 원숙기로(유영국전)」, 『조선일보』, 1975.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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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제6회《유영국작품전》(1976) 「유영국 작품 초대전」, 『중앙일보』, 1976. 04. 05 「유영국 작품 초대전」, 『조선일보』, 1976.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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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8집 | 2012 제7회《유영국작품전》(1977) 「시즌 하이라이트」, 『계간미술』5호, 1978,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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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미술-유영국 유화전」, 『동아일보』, 1977. 10. 26 「유영국 유화 개인전」, 『경향신문』, 1977. 10. 27 「유영국 유화전」, 『독서신문』, 351호, 1977. 11. 06 「화제와 소식: 유영국 유화전」, 『공간』, 1977. 11,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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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제8집 | 2012 《한국현대서양화대전》 (1977. 03. 14-04. 02,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단신-서울갤러리 개관전」, 『동아일보』, 1978. 08. 11 김인환, 「신 사실, 모던아트 화가들의 근작」,『공간』, 1977, 7. pp.97-98 「현대서양화대전」, 『동아일보』, 1977. 03. 14 《6월 초대작품전》 (1977. 06. 21-06. 30, 희화랑) 《서울갤러리 개관 기념전》 (1978. 08. 12-08. 21, 서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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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신사실파 회고전》(1978. 09. 22-09. 30, 원화랑) 「신사실파 회고전 재개 25년 만에… 원 화랑 개원기념」, 『중앙일보』, 1978. 09. 26 「전시회-신사실파 회고전」, 『경향신문』, 1978. 09. 27 「내주의 행사 : 전시회-신사실파 회고전」,  『경향신문』, 1978. 0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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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제8집 | 2012 유영국 작가론 및 기고 박래경, 「아뜨리에 탐방-유영국」, 『화랑』, 4호, 1974. 여름, pp.29-35(사진/임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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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제8집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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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제8집 | 2012 유준상, 「빛의 구조를 좆아」, 『화랑』, 9호, 가을, 1975, p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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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제8집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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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8집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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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장욱진, 「고집으로 지내온 화가 영국」, 『화랑』11호, 1976, 봄, p.44유영국, 「언제고 스스럼없이 자네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 욱진」, 『화랑』11호, 1976, 봄,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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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제8집 | 2012 문책, 「유영국, 산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어」, 『공간』, 1977. 11, p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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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제8집 | 2012 잡지 표지 게재 도판 『화랑』, 7호, 1975. 봄. 표지 『독서신문』, 317호, 1977. 3. 6.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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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계간미술』, 4호, 1977. 가을 표지 「표지의 화가」, 『계간미술』, 4호, 1977.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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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제8집 | 2012 『공간』, 1978. 2. 표지 「표지의 말」, 『공간』, 1978. 2,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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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신동아』, 1968. 5. 표지 『신동아』, 1975. 11.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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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제8집 | 2012 제21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예술원상 영광의 세 얼굴-문학 박두진, 미술 유영국, 음악 김순열」, 『경향신문』, 1976. 06. 30 「올해 학술원상 수상자 결정-문학=박두진씨, 미술 =유영국씨, 음악-김순열씨」,  『조선일보』, 1976.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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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21회 예술원상 수상자 결정(문학 박두진 미술 유영국 음악 김순열 씨)」, 『동아일보』, 1976. 06. 29 「제21회 학·예술원상 시상식-차상원, 박두진 교수 등 5명 수상」, 『동아일보』, 1976. 09. 18 「예술원상 수상자 문학 부문 박두진 씨 미술 부문 유영국 씨 음악 부문 김순열 씨」,  『매일경제』, 1976. 06. 29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문학 박두진 씨 미술 유영국 씨 음악 김순열 씨」,  『경향신문』, 1976. 06. 29 「학·예술원상 5명에 시상」, 『경향신문』, 1976.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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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제8집 | 2012 「미니 인터뷰-예술원상 탄 유영국」, 『화랑』, 13호, 1976, 가을, p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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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기타 박고석, 「그 시절-모던아트 시절」, 『화랑』, 2호, 1973. 겨울, p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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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제8집 | 2012 「현대미술가 인명록 (상)」, 『화랑』, 5호, 1974. 가을, p.87 「유영국·김봉태·유강렬·허민씨 회화작품 8점 기증 국립현대미술관에」,『중앙일보』, 1978. 05. 20 「국내뉴스」, 『화랑』, 20호, 여름, 1978,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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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미술계에 국전개혁론」, 『동아일보』, 1977.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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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제8집 | 2012 이일, 「한국추상미술을 진단한다」, 『계간미술』, 6호, 1978, 여름, pp.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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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제8집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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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제8집 | 2012 「평론가 11인이 뽑은 한국의 추상화가 10인」, 『계간미술』, 6호, 1978, 여름 「열 사람의 화가, 평론가들 선정」, 『동아일보』, 1978.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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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제8집 | 2012 해석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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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연구 유영국의 회화:  동양의 예술관을 통한 서양미술의 수용 정하윤 돈구리카이(團栗會)와『제2고보전』: 미술교사 사토우 쿠니오(佐藤九二男)의 활동배경 이우치 가츠에(井內佳津惠) 유영국의 1970년대 작품에 대한 단상: 아방가르드 VS = 전통? 김주원 자유정신과 자연을 향한‘랩소디’ 이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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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8집 | 2012 I. 서론 한국의 근·현대 미술은 서양 미술과의 직·간접적인 교류 속에서 형성되었다. 20세기 초 에는 일본을 통해, 그리고 중반부터는 직접적으로 외국의 문화와 교류하면서, 한국의 작 가들은 전통을 배타적으로 수호하기보다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등 이질적인 요소들 을 화해시키려 노력하였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위한 방법을 탐구하 였다. 한국 미술의 현대화, 특히 현대 추상회화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 평가 받는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의 회화에도 서양의 미술을 한국의 토양에 맞게 받 아들이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그의 회화에는 한국에 새로이 유입된 서양의 미술을 한국적인 색채를 입혀 변형시키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미술계의 전반적인 흐름 에 대응하며 변화했다.  본 연구는 유영국 회화의 특징들을 서구의 미술경향과 단선적으로 비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작품의 변화를 당대 한국의 사회적 맥락과 예술적 동향 속에서 고찰하고자 한 다. 기존의 유영국에 관한 연구는 서구미술과 형신적인 측면에서 비교에 집중하여 유영국을 서구미술을 모방했다고 평가하거나, 서양의 추상회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선구자로 묘사 하였다. 1) 특히 유영국에 관련된 대개의 학위 논문들은 그의 회화를 당대 사회의 맥락으로 부터 작품을 유리시키는 경향을 보이며, 작품의 형식적 변화만을 살피는데 그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영국의 활동과 작품은 역사적 맥락에 의한 것이며, 그의 추상 회화의 진정한 의미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분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영국에 대한 연구를 가 장 지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하고 있는 이인범은 그의 논문,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 유영국의 회화: 동양의 예술관을 통한 서양미술의 수용 정하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1) 대표적으로 이원화는 유영국이“서양화의 조형언 어를 충실히 익히고 보급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나, 현실의식의 결핍으로 모방의 한계를 전면 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원화, “한 국의 신사실파 그룹”, 「홍익」, 제 13권, 1971. 5 . p .64. 반면 유근준은 유영국을“한국 추상회화의 도입에 공헌한 선구자”로 묘사했다. 유근준, “한국 추상회화의 특성”, 「예술논문집」, 제 10집, 한국 예술원, 1971, p. 119. 또한 유홍준은 유영국을 “모더니즘을 토착화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작 가”로 평가했다. 유홍준, “추상세계의 다양한 편 력”, 「선미술」, 제 12호, 1981.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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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재해석의 단서”에서 유영국의 활동과 작품이 역사적 맥락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였는데, 그 의 연구는 1963년까지의 작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유영국의 회화 세계의 전반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본 논문은 유영국이 타계하는 2002년까지로 논의를 확장시키고자 한다.2)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영국의 작품을 살피는 것은 외래 양식과 전통적인 예술관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 근ㆍ현대 미술의 한 단면을 보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론의 II장에서는 유영국이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접했던 배경을 살펴볼 것이고, III 장에서는 그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는 해방 후 작품의 양식적 변화 과정을‘자연의 추상화(抽象化)’, ‘구축과 표현의 공존’, ‘서정적 기하추상’, ‘구상성이 부각된 추상화(抽象 畵)’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것이다.  II. 유영국 작업의 배경: 1930년대 서구 모더니즘 미술과의 접촉 유영국은 1916년 울진에서 태어나 경성 제2고보에 진학하였으나 졸업을 1년 앞두고 일본 으로 건너갔고, 1935년부터 동경 문화학원에서 일본에 수용된 서구미술을 습득하였다. 식 민지 시기 동안 동경은 한국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서구의 새로운 미술을 접하기 시작한 곳 이었는데, 3)특히 1930년대에는 동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화가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 고 , 그들은 서구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실험하였다. 4) 이는 당시 동경에서 전위미술 경향이 활성화되었던 것과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 교수로 재직하던 사립학교 로 진학한 한국인 유학생의 숫자가 증가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 5) 문화학원, 일본학교 등의 사립학교 및‘독립미술가 협회’나 유영국이 속했던‘자유미술가협회’와 같은 재야 단체에 서 새로운 서구 양식을 접했던 한국 미술가들의 대부분은 일본 전위화단을 이끌었던 주요 경향인 야수파적인 성향과 기하추상 계열에 집중하였다. 6) 당시 한국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서양의 모더니 즘 미술 경향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묶어 아카데미즘에 반대되는‘새로운 미술 형식’ 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7) 이것은 20세기 초반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던 서 구 모더니즘 미술의 여러 경향들이 일본으로 동시에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은 한 화면에 여러 경향을 혼재시키기도 하고, 한 작가가 여러 경향을 탐구 하기도 했다. 유영국 역시 철저한 기하 추상과 더불어 경주의 고적을 담은 사진들, 포토몽타 쥬(photo montage)와 같은 서구의 새로운 사진기법을 이용한 작품, 그리고 초현실적 느낌 이 강한 회화를 동시에 제작했다. 또한‘자유미술가협회전’에 유영국, 이규상과 같이 순수 2) 이인범,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 재해석의 단서”, 「한국근대미술사학」, 제 10권, 2002. 3) 한국에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치하에 있던 1920년대였다. 한국은 일 본이 받아들인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구 축주의 등 다양한 미술 경향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 통로는 주로 인쇄매체였다. 그러나 미래주의의 영향을 감지할 수있는주경(1905-1979)의<파란 >(1923)을 제외하고는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이 보 이는 작품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이론적인 소개가 작 품 제작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4) 오광수는 일시에 약 50여 명 정도의 화가 지망생이 동경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였다. 오광수, “자연 주의의 계보”, 『한국현대미술 전집』, 제 7권, 정한 출판사, 1980, p.84. 5) 1932년 전에 한국화가들은 적절한 추천서만 있으 면 동경미술학교로 진학이 가능하였으나, 이후 이 러한 특별입학이 불가능해지면서 사립학교로 진학 하는 한국인 학생들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김영나, “1930년대 한국근대회화”. 「미술사연구」, 제 7권, 1993, p.32. 6) 초현실주의는 1930년대의 일본 전위화단을 이끌 었던 주요 흐름 중 하나였으나, 한국의 화가들의 참여는 비교적 저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하건, 김영주, 김자영웅 (김종남)이 초현실주의 계열의 그룹이었던‘미술문화협회전’에 참여하였고, 김 만형은 <적파풍경>으로 1937년 제7회‘독립미술 협회전람회’에 입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외의 작품이나 활동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별로 없고, 김자영웅의 <수변>(1941)과 김하건의 <항구의 설계>(1942), <고원의 봄>(1943) 등 몇 작 품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유준상, “1930년 대의 일본근대회화”. 『한국현대미술의 형성과 비 평』, 미진사, 1985, p.275. 김영나, “1930년대 동 경 유학생들-전위그룹전의 활동을 중심으로,”『20 세기의 한국미술』, 예경, 1998, pp.309-314. 정유 진, 『1930년대 그룹 활동으로 본 일본 초현실주의 미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 위 논문,  2006, 참고.  7) 김주경은“조선의 서구미술 수입은 일본의 서구미 술 수입사와 따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하다”고 언급하면서 지금 조선미술에서는“후기 인상파적 토대 위에 마티스, 루오 따위의 포비즘, 쉬르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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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제8집 | 2012 한 기하추상을 표방하는 작가들과 이중섭, 문학수 등과 같이 문학적 내용을 다루는 구상화 가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화가들에게는 서구 모더니즘의 각 양식을 구분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이 시기 한국 작가들이 갖는 모더니즘 수용 양상에 있어서의 또 다른 특징은 서구 모 더니즘 작품, 또는 일본 재야 미술가들의 작품과의 형식적 유사성이다. 이는 당시 미술가들 이 작가 개인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정립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매체와 그에 따른 표현방식을 체득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영국의 작품에도 전반적으로 러시아 구축주의와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신조형주의의 영향 (도판1)과 말레비 치의 절대주의, 아르프( Hans Arp, 1887-1966)의 유기적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러한 형식적 유사성은 한 작가가 새로운 미술 형식을 접했을 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 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한국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시에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은 언론과 전시를 통해 한국화단에 전달되었다. 8) 새로운 미술이 소개되면서 이에 대한 상반되는 의견 이 대립하였는데, ‘조선적인 회화’를 옹호하는 이들은 동양적인 소재와 내용을 담아야 한다 며 모더니즘 미술, 특히 추상화를 매섭게 비판한 반면 모더니즘을 옹호하던 이론가들은‘조 선적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제기하였다.9)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이 미처 무르익기 전에 한 국의 미술계는 태평양 전쟁, 해방, 6·25 전쟁이라는 일련의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결과적 으로 해방 직후의 한국은 새로운 미술의 양식을 꽃피우기에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 다. 당시 조선 화단에 대해 이경성의“불모지” 10)라고 표현한 바 있다.  유영국은 이와 같이 어려운 시대적 상황 아래 추상미술을 포함한 서구 모더니즘을 학습하였다. 일본 유학시기에 제작된 유영국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서양의 미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한 흔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이후 그의 회화 전 개의 초석이 되었다.  III. 해방 이후 유영국 회화의 변화 1. 자연의 추상화(抽象化): 1947-1958년 태평양 전쟁이 조짐을 보이면서 일본 사회가 극단적인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자 유영국은 1943년 고향 울진으로 돌아간다.11) 그러나 태평양 전쟁과 뒤따른 광복 후의 혼란으로 인해 리즘, 큐비즘과의 중간, 포비즘과의 중간 또는 표 현파나 인상파의 중간이 뒤섞여 나왔다”고 기술했 다. 김주경, ‘조선화단의 회고와 전망“. 「조선일 보」, 1932. 1. 1-9,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8, p.294, 재수록. 8) 대표적인 글로는 조오장의“전위운동의 제창”(조 선일보, 1938. 7. 4), “신정신의 미래”(조선일보, 1938, 10.17), 김기림의“수첩 속에서-현대예술 의 원시에 대한 요구”(조선일보, 1933. 8. 9), 그 리고 조우식의“소개-전위사진”(조선일보, 1940. 7. 6-9) 등이 있다. 대표 전시로는 구본응, 김총찬, 이규상, 김환기, 김하건 등의 개인전과‘양화 극현 사 전람회’(1939)와‘창작미술가협회 경성전’ (1940) 등을 꼽을 수 있다.  9) 심영섭, 김용준 등은 서양과 동양의 예술적 전통을 이성과 감성으로 대비시키고, 이전의 서구 미술을 전자에,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미술을 후자로 분 리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서구 모더니즘 미술은 ‘주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동양미술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10) “그러나 그들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토양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불모지였다. 그것은 군국주의에 시달린 국민 대중이 그것을 받 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나 할까, 결국 이러 한 새로운 미술운동은 국한된 일부 지식인과 전문 화가 이외에는 아무 반응도 없이 주저않고 말았 다.”이경성, 『한국근대미술연구』, 동화출판공사, 1974, p.101. 11) 유영국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일 본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탄압을 받아 서 갑자기 딴 경향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또 전 쟁 말기라 많은 작가들이 전쟁에 끌려가고… 모두 가 작품제작을 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 전쟁이 심해서 그림은 그릴 수 없고, 그러다가 해방이 되 었지요.”, 박정기, “추상회화의 외길 60년”, 「월간 미술」, 1996. 10, pp.61-6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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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한국에서도 작업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영국 스스로“공백기” 12)라고 명명한 것처럼 이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 작품 제작의 양이나 현존하는 그림의 수가 적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10년간은 유영국의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는 작품에서 괄 목할만한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 유학 시절에 보였던 순수한 추상 속으로 자연이나 도시와 같은 외부 세계의 모습이 편입되기 시작한 점으로, 서양의 추상미술이 화 면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지우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변화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49년에 그려진 회화작품이다. (도판2) 이 인범은 이 작품이‘제 2회 신사실파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것 중에서 <직선이 있는 구도>라 는 제목의 그림일 것이라 추정한다. 13) 엄격한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제목이나 노란색의 타원, 노랑, 빨강, 녹색의 형태, 그리고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붉은색 선 등의 요소들 로 이루어진 화면은 일본 유학 시절의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전의 작품에서 각각의 색면들이 조형요소로서의 의미만을 갖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 노란색의 타원형은 달을, 녹색의 형상은 나뭇잎을, 상단의 노란색과 흰 색의 원들은 꽃을, 그리고 수직선은 나 무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자연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특징은 1953년에 있었던‘제 3회 신사실파전’의 출품작 (<산맥>, <나무>, <해변에서 A>, <해변에서 B>)으로 이어졌으며, 유영국은 이외에도 <산과 구름>( 1957), <노을>(1957), <산> (도판3, 1957), <계곡>(1958) 등과 같이 자연을 소 재로 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영국 작품을“자연 추상” 14) , 또는“자연주의적 추상화” 15)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연이라는 소재 때문일 것이다. 12) 강석경,『일하는 예술가들』, 열화당, 1994, p.97. 1. 작품 10-4 1941년, 엽서본 2. 직선 있는 구도 1949년, 캔버스에 유채, 53x45.5cm 3. 산 1957년, 캔버스에 유채, 100x80cm 13) 이 작품이 신사실파 2회전에 출품된 것이라면 <직 선 있는 구도A~D>, 또는 <회화 A~F> 중 하나였 을 것이고, 앞 뒤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직선이 있는 구도>일 확률이 높다. 이인범. “신사실파, 추 상과 자연이 만난 장소”, 『유영국 저널』, 제3집, 유 영국미술문화재단, 2006, pp.23-24, 참고. 14) 윤우학, “자연에로의 독백”, 「공간」, 제147호, 1979. 9, p.48. 15) 유근준, “한국추상회화의 특성”, 「예술논문집」, 제10집, 한국예술원, 1971. 5,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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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제8집 | 2012 추상의 화면에 자연을 도입한 것은 이경성이 주장하듯이 울진에서의 피난시기에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생활했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16) 작가 자 신도 그의 작품에 자연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게 된 것이 산이나 숲으로 둘러싸인 고향에 서의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술회했다.17) 그러나 이일이 지적하듯이 작가의 개 인적인 체험이 급격한 작품의 변화를 야기한 이유의 전부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 구체적인 형상이 등장하는 것은 당대의 여러 작가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기에 작가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은 맥락 안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18) 새롭게 접한 서양의 조형 양식과 자국의 전통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것은 해방 직후 한국 화단의 화두가 되었고, 특히 민족의 현실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던 추상 계열의 작 가들은 자국의 전통이나 당대의 현실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 인다. 추상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던 남관과 오영진은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추상미술은 민족이 실제 체험한 것, 사실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화단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19) 또한, 추상미술의 대표 화가인 유영국과 김환기가 속해있던 그룹의 이름은‘신사실파’였다. 이에 대한 이인범의 해 석은 타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는 신사실파가“추상을 표현의 방법으로 하더라도 그 바탕 이 되는 내용은 사실, 즉 자연의 모습이나 현실의 반영이라는 조형의식을 기반으로 자연형 태를 거부하지 않은 채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재구성하고자 한 것” 20) 이 라 설명했다. 유영국과 그 주변의 추상미술 작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정신을 지향 하기 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21) 김환기의 <나무 와 달>( 1948)과 같이 자연의 요소를 반영하거나 <판자집> (1951)처럼 당시 한국의 모습을 담은 작품은‘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던 태도로 해석할 수 있으며, 동료 화가였던 김 병기가 말한 것과 같이, 유영국은 한국의 자연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과제에 참여 했다고 할 수 있겠다. 22) 이와 더불어 당시 유영국의 회화에 대해 작품에서 민족적 요소를 느낄 수 있는 구체 적인 형상을 담지 않았다는 비난은 유영국의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 자연의 요소와 무관하 지 않아 보인다. 23) 실제로 유영국의 화면 안으로 편입된‘자연’이라는 소재에서 한국적, 그 리고 보다 넓게는 동양적인 특성을 발견한 학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정병관은 유 영국 회화의 자연의 모티프를 전통 산수화와 연결시켜 설명했다.24) 유영국의 그림이 비록 산수화의 철학적 의미까지 담아내지는 않았지만 자연을 생각하는 정신에 있어서는 전통미 16) 이경성, “한국 추상회화의 거목”,『YOO YOUNG-KUK』, 유진, 1997, p.11. 17) 이일, “조형과 자연의 변증법”, 「계간미술」, 1979, 여름, p.34. 18) 이일, 위의 글, p.34.0 19)“국제 미술전을 중심으로: 한국에서의 추상”, 「신 천지」, 1953. 10. 『유영국 저널』, 제 4집, 유영국미 술문화재단, 2007, p.216, 재인용. 20) 이인범, “신사실파, 추상이 자연과 만난 장소”. 『유영국 저널』, 제 3집, 유영국미술문화재단, 2006, p.35. 21) 김주원, “유영국에 있어서‘리얼리티’의 장소”. 『유영국 저널』, 제 5집, 유영국미술문화재단, 2008, p.135. 22)“유영국 학술심포지엄”, 「한국 근대 미술사학」, 제10호,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구 한국근대미술 사학회), 2002, p.380. 23) 예를 들어 서강헌은 유영국의 추상작품에 대해 “민족미술 건설을 부르짖는 이 때”, “특히 오늘날 절망적인 민족문화의 위기”에서“용허될 수 없는 큰 과오임을 지적한다”고 말하며“무리가 많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수형은“대중성을 몰각, 거세한 공공적인 의미에서 건강치 못한 것을 어떤 신선한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 안주하여 무엇인가 실험하 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무슨 모더니티를 지 향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기록하면서 당혹감을 표 현했다. 서강헌, “신사실파전”, 「자유신문」, 1948. 12 . 15, 『유영국저널』, 제4집, 유영국미술문화재 단, 2007, p.100, 재수록. 이수형, “회화예술에 있 어서의 대중성 문제: 최근 전람회에서의 소감”, 「신천지」, 1949. 3, 『유영국저널』, 제 4집, 유영국 미술문화재단, 2007, p.104, 재수록. 24) 정병관, “중용의 미학”, 『YOO YOUNG- KUK』, 유진, 1997, p.21. 최병식, “자연관으로 살펴본 우리 미술”, 「월간미술」, 1999. 5,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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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술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여긴 것이다. 또한 유근준은“한국인의 미의식의 솔직한 반영” 25) 이라 이야기했으며, 이인범은“한민족 예술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염두에 둔 것” 26)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최병식은 유영국을“한국의 자연이 갖는 미의식의 세계를 현대화한 대 표적 작가”로 꼽으며, 이는 그가“한국적 자연미감에 강하게 세례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 하였다. 27) 더불어 다음과 같은 작가의 언급은 유영국의 그림 속에 자연이 출현하는 것이 한국 미술의 전통과 연관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일본에서 한국에 돌아와 보니, 현대미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네요. 해 방이라고 해서 그림 그릴 엄두도 안 나고, 그리려고 해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 길이 없어요. 답답해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온 추상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 는가를 내 나름대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보 후퇴한 거지요.” 28) 여기서의“일보후퇴”는 이경성이 지적했듯이 현대적 감성으로 인식되던 추상미술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뿌리를 짚어보았음을 의미한다. 29) 이는 이전에 동경에서 학습했던 서구의 것을 한국의 상황에 맞게 받아들이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결과로서 동양 미술의 전통에서 핵심을 이루던 자연의 요소가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이라는 요소를 추가하였지만, 기하 추상이라는 형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대 부분의 그의 회화 작품은 나뭇잎이나 숲과 같은 자연의 요소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단순화, 평면화 되었다. 해방 직후의 10여 년간 유영국은 소재적인 측 면에 있어서는 동양미술의 전통에 기대면서, 현대 서구 회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고 정리할 수 있겠다. 2. 구축과 표현의 공존: 1959-1967년 1959년경부터 1967년에 이르는 기간은 유영국의 회화에서 견고한 구조가 가장 완화 되었 던 때이다. 도판 4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분명한 구획 대신 작가의 붓질, 강렬한 색감과 같 이 표현적인 특성이 처음 나타나며, 1960년 전후의 시기부터는 역동성이 강하게 느껴지 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화면을 이끌어 가던 검정색의 윤곽선은 대부분 없어졌으며, 25) 유근준, “한국추상회화의 특성”, p.120. 26) 이인범, “신사실파, 추상이 자연과 만난 장소”, 『유영국 저널』, 제3집, 유영국미술문화재단, 2006, p.31. 27) 최병식, “자연관으로 살펴본 우리 미술”, 「월간미 술」, 1999. 5, p.120. 28) 박정기, “추상회화의 외길 60년-유영국 화백 인 터뷰”, 「월간미술」, 1996. 10. p.65. 29) 이경성, “출발부터 진보적이나 우리 미감으로 밀 도 있는 조형”, 「계간미술」, 1981. 겨울, p.43. 30) 한국의 앵포르멜은 전후 프랑스에서의 앵포르멜 운동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함께 영향을 미쳐 생성되었고, 1949년 설립된‘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전) 미술계의 헤게모니 다툼과 관전의 아카데미 즘적인 성향에 반발하는 젊은 미술인들의 경향 중 하나이다. “앵포르멜”이라는 명칭은 방근택이 처 음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사용 되고 있다고 여겨졌으나, 정무정의 연구에 따르면 김영주가 1956년 3월 13일자「조선일보」에 발표 한“현대미술의 방향-신표현주의의 대두와 그 이 념”이라는 글에서 앵포르멜이라는 용어가 사용되 고 있었으며, 이 무렵부터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 주의에 대한 정보가 소개되었다. 정무정, “추상표 현주의와 한국 앵포르멜”, 「미술사연구」, 제15집, 2001, pp.254-257, 참고.  당시 한국 화단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했던 이러한 앵포르멜 경향은 젊은 세대들에게 뿐만 아니라 기 성 세대를 포함한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미 자신의 양식을 확립했던 이규상, 박고석, 한묵, 김 경 등의 작가들 역시 거친 질감과 비정형의 형태들 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예를 들어 이규 상의 1957년 작품인 <작품 C>에서는 구체적인 대 4. 작품 1957년, 캔버스에 유채, 25x3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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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제8집 | 2012 나이프에 의해 만들어진 비정형의 색면과 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1961년에 이르면 검정색 외곽선이 완전히 사라지며, 윤곽선이 불분명한 밝은 색채의 면이 화면을 채운다.  이러한 작품에서의 변화는 당시 한국 화단에 팽배하던“앵포르멜” 30) 열기와 관련되 어 있음이 김인환, 오광수, 유홍준, 기혜경 등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31) 이 들의 의견은 타당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유영국의 회화에서 보이는 구체적 형 상의 배제, 마티에르의 강조, 빠른 필치, 커다란 캔버스 등 앵포르멜과 형식적인 유사성 때 문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과 더불어 당시 유영국이 앵포르멜의 열기가 가득했던 당대의 화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 또한 그의 작품과 앵포르멜 경향 과의 연관성을 증대시킨다. 32) 실제로 유영국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현대작가추대 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고, 여기에서‘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한 앵포르멜 계열의 작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실제로 1958년과 1959년의‘현대작가 초대전’에 유영국은 견고한 구조의 <계곡>이나 <새>등을 출품하였는 데, 전시를 관람한 세계일보의 한 논객은 이에 대해“빈틈없는 구성과 조립으로 합리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너무도 튼튼한 바탕의 미의식에서 오히려 불만을 주고 있다. 조 형의 근본적인 원리와 처리에 지나치도록 마음을 쓴 탓으로 빈틈 있는 현대인의 휴식이 없 다” 33) 고 평했다. 그 후 유영국은 비정형의 회화로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데, 이 변화는 앵포 르멜 또는 추상표현주의의 경향이 대두되었던 1960년‘제 4회 현대작가 초대전’에서 보여 졌다. 또한‘제 5회 현대작가 초대전’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한 <산>(1961)에서부터는 빠른 붓질, 거친 질감 등을 보다 과감하게 사용한 화면을 선보였다.  유영국은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자신의 해석을 거쳐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그 의 회화는 정병관과 이일이 지적한 것처럼,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34) 이는 유영국의 작품이 즉흥적, 감정적,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표현적인 요소 안에 이전 시기의 작품 경향과 같은 구축적인 성향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 특징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화면에 나타나는‘선(線)’이다. 이전 시기의 검정색 윤곽선과 비해 작가의 감정이 표출된 듯이 빠르고 거친 느낌이 있지만, 그의 선은 우 발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1960년의 회화 작품 (도판5)에 서 보이는 하얀 선은 언뜻 즉흥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산맥과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미리 계획된 것에 가깝다. 그리고 두꺼운 마티에르 위에 선명한 선의 자국을 남기기 위해서 는 주의를 기울여 칠해야 함을 고려할 때, 그가 남긴 선들은 시간을 들여 의도적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을 연상시키는 일체의 것을 배제하고 순수한 구 성주의적 방법으로 화면을 구획하고 있다. 그러나 1959년 <컴포지션>에 이르면, 기본적인 도형으로 환원된 기하학적 추상을 유지하면서도 거친 질감 과 표현적인 특성이 보인다. 또한 유영국과 함께 ‘모던아트협회’에서 활동하던 한묵의 <우기 >(1958)나 김경의 <조우>(1960) 역시 앵포르멜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기혜경, “모던아트 협회와 1950년대 화단”, 『근대미술연구』, 국립현대미술 관,  2004, pp.154-169, 참고. 31) 김인환은“찢어지듯 비행하는 비정형화한 형상들 을 통해서 그 시기에 이입되기 시작한 추상표현주 의의 한 편린이 작가의 감수성과 마주쳤으리라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 [유영국]가 거기에 동요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분석했다. “자연에의 근원적 결구와 내연”, 「공간」, 제147호, 1979. 9. p.46,  오광수는“추상표현주의의 공감적 유대”라고 표현 했다.『20인의 한국현대미술가를 찾아서』, 시공사, 1997, p.243. 또한 유홍준은 유영국의 작품에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공감에서 나온 액션적 요 소”를 발견했다. “추상 세계의 다양한 편력”, 「선미 술」, 제12호, 1981, 겨울, p.14. 기혜경 역시“유영국의 작품 변화는 액션적인 성향 이 강한 붓질을 심화시킨 것으로 1960년대 초반 우리 화단을 주도한 앵포르멜로부터 강하게 영향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던아트 협회와 1950년 대 화단”, 「근대미술연구」, 국립현대미술관, 2004, p.166. 32) 유영국은‘현대작가 초대전’에 참여하였고,‘2.9’전, ‘신구상공모전’, ‘세계문화 자유회 초대전’, ‘한국 현대회화 10인전’에 출품하였다. 또한 1958년11 월부터 1959년 4월까지 홍익대학교 전임 강사로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1961, 1962, 1964, 1965, 1968, 1971, 1972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 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1961년‘국제자유미술 동경전’과1963년‘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여하 는 등 국내외의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33)“제 4회 현대작가미술전 개막”. 「세계일보」, 1960. 4. 13. 오상길, 『한국현대미술다시 읽기 IV』, vol. 1, ICAS, 2001, pp.290-291,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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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또한, 밝은 색채는 유영국의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는데, 그는 순도 높은 색채를 사용하고 그들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색채의 사용에서‘표현 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서‘표현적’이라는 것은 산, 구름, 눈과 같은 자연의 모습 을 그리되 그 대상의 색이 아닌 주관적으로 선택한 색으로 그림으로써 색채를 대상 재현의 목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유영국은 다른 앵포르멜 추상화가 들처럼 뿌리기나 흘리기 등을 통해 색채가 자연스럽게 섞이거나 화면에 스며들어서 우연적인 효과를 만드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 하지는 않았다. 그는 물감을 쌓아 올리면서 단단하고 두꺼운 화면을 만들어 내면서 화면의 조화를 위해 최대한‘계산’하여 색채를 선택하고, 그것을 칠할 위치를 정했던 것이다.35) 이 러한 예는 유영국이 다른 앵포르멜 추상화가 들처럼 우연적인 효과에 기대지 않았음을 나타 낸다. 다시 말해, 이 시기 유영국의 회화는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견고한 구조와 작가의 주관 적인 느낌을 발현하는 표현성이 공존한다. 유영국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 김인환은“그럼에 도 한편으로는 그의 생태적인 체질의 한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구성성이 완강하게 지탱되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36) 이일은“구성적인 패턴을 기본 구조로 하면서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 적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 37) 이라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유영국에게 작가의 감정, 주관을 표현하는 것은 서양의 앵포르멜이나 추 상표현주의 작가들의 경우에서처럼 논리나 이성의 세계를 떠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 다. 그에게는 주지적인 측면과 주정적인 의도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었던 것인데, 이는 이성과 감성, 즉 지(知)와 정(情)을 구분하지 않는 동양의 예술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기운생동(氣韻生動)’이 그림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으로, 예술가 들은 그림의 대상을 보다 완전하게 나타내기 위해 대상과의 합일, 즉 대상의 기(氣)로 충만 한 상태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 상태는 화가의 이성을 잃은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대 상에 대한 최상의 깨달음에 이른 상태를 의미했다. 즉, 이성을 통해 대상의 실체를 간파함 으로써 그 정신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최고의 그림이 완성된다고 이해하였던 것이 다. 이처럼 동양예술의 전통에서는 정신성과 이성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었으며, 주정의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유영국의 그림은 이런 전통과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 할 수 있 다.  한국이 처음 참여했던 국제전인‘제 7회 상파울루(Sao Paulo) 비엔날레’(1963)에 유 영국이 참여하게 된 것도 그의 작품이‘동양의 정신적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 받았 34) 정병관은“유화백의 그림에서는 추상 표현주의 회화가 주는 격렬한 운동감에서 오는 감동은 찾을 수 없다. 완전한 정지 상태는 아니지만 감동의 고 열 현상과 같은 것이 없으며 조용한 움직임이 화면 에 태연한 것 같은 곡선을 따라서 생기면서 마음을 이끄는 작용을 한다”고 평했다. 정병관, “중용의 미학”,  p.19. 이일 또한 유영국이“자신의 회화를 액션적인 운필 그 자체에 환원시키거나 그 속에 해소시키거나 하 는 일은 없었다”고 말하며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지 적했다. 이일, “조형과 자연의 변증법”, p.37. 35) 박정기, “추상회화의 외길 60년”, p.65. 36) 김인환, “자연에의 근원적 결구와 내연”, 「공간」, 제147호, 1979. 9, p. 46.  37) 이일, “조형과 자연의 변증법, p.37. 5. 산 1960년, 캔버스에 유채, 100.5x100.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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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제8집 | 2012 기 때문이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는“각국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토착성’속에서 공동과 제” 38) 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유영국은 김환기, 김영주, 김기창, 서세옥, 한용진, 유강 렬 등과 함께 참가하여 <작품 숲>, <산1>, <산2>를 전시하였다. 김병기는 전시 서문에서 유 영국의 회화에 대해“견고한 광물적인 지각과 물과 대기와 또한 이를 내려 쪼이는 뜨거운 태양이 이루고 있는 풍토의 반영” 39) 이라 묘사하며 유영국의 작품에서 토착적인 요소를 찾 았다. 이처럼 유영국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엽까지 한국미술의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던 앵포르멜 경향을 이전에 그가 탐구했던 기하추상에 융합시켜 받아들였다. 서구 추 상미술의 최신 경향을 자신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시대 회화, 그리고 한국 전통 미술과 연관성을 보이며 자신의 회화를 변화시키는 유영국의 조형 태도는 1960년대 후반으로 이어진다.  3. 서정적 기하추상: 1967-1977년 유영국의 작품은 1967년을 기점으로 또 한 번의 변화를 보인다. 유영국은 이로부터 약 10 년 동안 화면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도형들을 중첩과 병렬의 방 법으로 반복시켜 운동감을 주었다.40) 이전의 기하 추상 경향이 다시 한 번 전면에 부각되면 서도 바로 전 시기의 유동성이 스며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유영국은 그룹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화단의 전체적인 동향을 무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홍익대학교에 재직하 면서 신진 세대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한국미술의 국제적 진출이 활발한 때에 맞추어 일본 에서 열린‘동경 국제미술전’(1967)과‘한국현대회화전’(1968), 그리고 인도, 네팔, 아프가 니스탄에서 있었던‘한국현대회화전’의 순회 전시( 1969) 등 다양한 국제전에 참여하는 것 을 통해 동시대의 세계 미술에 반응하면서 한국의 동료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유영국의 작품에서 다시 기하추상의 성격이 강해지는 것은 국내 미술계의 흐름과 연 관하여 해석할 수 있다. 1960년대 중엽부터 한국 화단은 앵포르멜 경향이 포화상태를 이루 었고, 작가들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방법이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그 노 력 중 하나가 기하추상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앵포르멜 이후에 기하추상이 등장하였듯이 한국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옵티컬 아트(Optical Art), 하드 엣지(Hard-Edge) 등과 같은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소개되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중요한 경향의 하 38)“파리 상우파울루 비엔나레 출품결정”, 「한국일 보」, 1964. 11. 3. 오상길,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 기IV』, vol. 1, p.447, 재수록. 39) 이 외에도 김영주의 회화를 송시대의 수묵화와 연 결시키며, 서세옥의 작품을 동양의 전습적인 재질 을 강조하며, ‘과거 십 수세기간에 있어 동양의 정 신적 특성을 그 본질의 상태에서 유지해 온 가장 순결한 지역’이었던 한국의 미술을 세계에 제시하 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를 표출했다. 김병기, “세계의 시야에 던지는 우리 예술”, 「동아일보」, 1963. 7. 3,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 1, p.443, 재수록. 40) 이 시기 작품들은 1967~1969년, 1970~1972 년,1973~1977년의 것으로 세분화시킬 수 있다. 1967년부터 약 3년간 유영국은 원이나 삼각형과 같은 도형을 반복하면서 대각선이나 수평, 수직선 에 의한 면 분할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또한 1970~1972 년에는 높은 채도의 바탕 위에 밝은 색의 선으로 바둑판 같은 격자 무늬를 만든 작품들이 제작된다. 그리고 1973년부터는 <작품>에서와 같이 날카롭 던 모서리가 둥근 각으로 변화되고‘산’의 이미지 를 보다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삼각형의 형태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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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나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특히 최명영, 서승원, 이승조 등으로 구성된‘오리진’(1963)의 멤 버들은 원과 사각형을 기본으로 기하학적 패턴이 반복되는 작품을 시도하였으며, 김구림, 곽훈, 김차섭 등의 작가들로 구성된‘회화 68’또한 기하학적 요소들이 나타나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앵포르멜의 선두에 섰던 박서보 역시 <유전질 No.1 _ 68>(1968)에서와 같이 기하형태를 시도한 것은 당시 한국 미술이 전반적으로 기하 추상의 조류에 이끌리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기하 추상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유영국은 동경에서 의 작업에서 보였던 엄격하고 명확한 구조로 돌아간 듯이 보이는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1970년대의 작품은 자연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일본 유학 시절의 작품들과는 차이를 보 인다. 1977년 진화랑에서 발표한 <산> 연작 36점을 보고 이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유영국]에게 있어 그 산들은 단순히 어떤 모양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무와 숲과 그 속에 자리한 지붕, 그리고 해와 달이 서로 화합하는 자연 자체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는 그것을 엄밀하게 다듬어진 어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41) 완전한 기하 추상과 같이 보이는 작품을 <산>이라고 명명한 것은 작가가 자연의 대상을 염 두에 두고 그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1970년대 중반에는 <일월도> (도판6, 1975)와 같이 보 다 직접적으로 나무, 산, 달 등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유영국은“내 그림의 주 제는 수십 년을 한결같이 자연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산이었다” 42) 라고 언급했는데, 이러 41) 이일, “조형과 자연의 변증법,”p.34. 42) 유영국, “산 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어”, 「공간」, 제125호, 1977. 11, p.34. 6. 일월도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05x1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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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제8집 | 2012 한 그의 의도대로 작품 속의 원이나 삼각형, 직선과 같은 조형 요소들은 태양이나 산, 지평 선 등의 자연물을 떠올리게 한다. 기본 도형들이 자연이라는 대상을 상징한다는 점은 유영국의 회화를 서양의 기하추 상 회화와 구분시킨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등 유럽 화가들의 추상회화는 대상 세계를 완전 히 떠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사각형은 외부의 대상을 재현하거나 축약한 것이 아니 라 철저하게 화면 안에 종속된 순수한 조형적 요소이다. 유영국의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제 작된 요셉 알버스(Joseph Albers, 1888-1976)의 <사각형에 대한 경의 (Homage to the Square)>와 같은 작품들도 형태와 색채가 만드는 효과에 주목한 순수한 추상화면이다. 이처 럼 외부 세계와 무관한 도형들이 만드는 서양 작가들의 추상 화면은 삼각형과 구체적 대상 인 산이 교차되는 유영국의 작품과는 차이를 갖는다. 유영국에게 삼각형이 표상하는 산은 묘사해야 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주관을 표현 하는 매개체였다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을 통해 드러난다. “산 속에 들어가 산을 못 보고 내려오듯이, 산 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다. 산을 내 려와서야 비로소 원거리의 산이 보이듯이, 멀리서 바라봐야만 산을 그릴 수 있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다.” 43) “화가가 자신이 보고 느끼고 나서 생각하는 자연, 그것은 단순히 보이는 구체적 그대로 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자연의 형태를 떠나서 선과 면과 색채로써 화면에 더 주관적으로 탐구되는 나의 자연, 나의 자연의 형태에의 탐구이다.” 44) 유영국은 이처럼 자연을 주관의 반영으로 보았으므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답사하거나 스 케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에게 삼각형으로 상징되는 산은 실제의 산이라기보다 산 에 대한‘관념’의 표상에 가깝다.  이렇게 구체적 대상인 산이 작가의 주관에 의해 요약되어 삼각형이라는 추상형상이 되었다는 점은 유영국의 회화를 다시 한 번 동양미술의 전통과 연관시키는 지점이 된다. 서 양에서는 구상과 추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여, 구상은 대상의 외관을 똑같이 재현 하는 것을, 추상은 대상 세계를 완전히 떠나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왔다. 그러나 전통 동양미술 속에서 구상과 추상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양화법의‘사 생(寫生)’에 상당하는 동양의‘응물상형(應物象形)’의 목적은 대상을 개인의 정감을 통해 표 43) 유영국, “산 속에 들어서면 산을 그릴 수 없어”, 「공간」, 1977. 11, p. 34. 44) 이흥우. “유영국-원숙의 서정성”, 「화랑」,  제27호, 1980, 봄,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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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현하는 것이었다. ‘응’은 외부의 대상에 감응하면서 그 형태의 특성을 잘 표현해 내는 것을 의미했음에도 형체에 얽매이는 것은 지양했던 것이다.45) 또한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는 뜻의 이형사신(以形寫神)도 형태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이 맺는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인 데, 이 역시 사물 안에 존재하는 정신을 형상을 통해서 표현할 것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형이라는 수단을 통해서(以形) 자신이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 를 드러내는 점이다(寫神). 동양의 미술가들은 형상이 없으면 정신이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겼 고 , 따라서 형상과 정신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추상적인 관 념, 작가의 정신을 구체적인 대상의 형태를 그림으로써 표현하고자 했다. 이처럼 동양의 미 술에서 정신이나 감정의 표출은 구상성이 소멸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았다. 유영국의 그림은 이와 같은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유영국에게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의‘추상성’과 객관 적이고 재현적인 측면의‘구상성’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서양식의 구획으로는 상치되는 이 두 개념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한다는 것은 그의 작업을 동양 예술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는 단서가 된다. 이와 같이 기하추상의 화면이 자연을 연상시킨다는 점은 서정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데, 유영국 작품의 서정적인 측면은 이전의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유 홍준은‘차가운 추상’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기하추상에서 감수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작 가 자신의 마음에는 결코 차갑게 몰고 갈 의도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46) 오 광수가 유영국의 작품에 대해 말한“차가운 듯하면서도 뜨거운 느낌” 47) 은 유영국의 기하 추 상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성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근대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1970년대는 전 사회적으로 우리의 문화유산, 전통의 의미가 강조되는 시기였다. 미술계에서도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한국적 현대 미술’의 정립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이제까지의 한국미술이 지나치게 서구미술의 모방이 아니었나를 자성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유영국 역시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70년대 초부터 그의 드로잉과 유화 작품 (도판7, 1972)이나 도자 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기와는 작가의 한국의 전통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더불어 해방 후 일본과의 첫 번째 공식적인 교류였던 1968년의‘한국현대회화전’과 관련된 일화는‘한 국적인 회화’에 대한 유영국의 관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유영국은 이 전시 와 관련하여 7월17일에 열린 좌담회에서 이우환이“문화적 차이는 국제 미술계에서 살아 남기 위한 불충분한 조건” 48) 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며, 150호 캔버스 전 45) 김인환, 『동양예술이론』, 안그라픽스, 2003, pp.77-80, 참고. 46) 유홍준, “유영국론: 추상 세계의 다양한 편력”. 「선미술」, 제12호, 1981, 겨울, p.14. 47) 오광수, “유영국론”. 「공간」, 제 12호, 1967. 12.  p.81. 48) 유영국과 이우환, “한국 현대미술의 배경(韓國現 代美術の背景”, 『현대의 미(現代の美)』, 1968, 8. P . 165.JoanKee,Points,lines,encounters,worlds: Tansaekhwa and the formation of contemporary Korean art, Ph.D.,New York University, 2008, p.44, 재인용. 7. 지붕 1974년, 캔버스에 유채, 65x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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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제8집 | 2012 체를 형광색으로 뒤덮은 이우환의 작품을 보고 그것도 작품이냐며 화를 내었다.49) 이어서 유영국은 이우환에 대해“국적 불명의 젊은 애가 까부는데 버릇 좀 고쳐주고 가시오”라고 말하며 핏대를 세웠다. 50) 윤명로는 또한 유영국이 전시의 반응에 대해 특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보였고, 이것은 유영국이 당당한 우리 미술을 일본인에게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 하다고 전했다. 51) 이와 같은 일화는 유영국이 한국성에 대한 시대적 고민을 공유했음을 추 측하게 하는 하나의 단서로 읽힐 수 있다. 4.  구상성이 부각된 추상화(抽象畵): 1978-1999년 1979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대규모의‘유영국초대전’은“추상미술의 선구자”라 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52) 그 후 유영국은 갤러리 현대(1995, 1998), 호암 갤러리(1996), 가나아트센터(2002) 등에서 크고 작은 개인전을 여러 차례 가졌 고 , 파리 시립미술관에서의‘살롱 드 메 ( Salon de Mai) 초대전’(1978), ‘살롱 도톰느(Salon de Automne)’(1982), ‘바젤 아트페어(Basel Art Fair)’(1996), 일본의 네 개 지역과 타이페 이시립미술관을 순회했던‘동아시아 회화의 근대-유화의 탄생과 그 전개전’( 1999, 2000) 에 참여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1979년경부터 1999년까지의 시기에 유영 국은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동시대의 국제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시 한국 화단의 흐름에 반응하면서 자기 특유의 작품 양식을 전개시켰다. 이 시기에는 추상성과 구상성이 공존하는 특징을 보인다. 일례로 < Work>(도판8, 1978)의 중앙에 위치한 초승달 모양의 하늘색 면은 마치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강과 같이 보 인다. 그리고 화면의 상단에 위치한 두 개의 푸른색 사각형은 색면임과 동시에 산과 하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전 작품에서는 화면의 평면성이 강조되었다면, 이 시기에는 평면성과 공간감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이경성은 작품에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성격이 강해진 것에 대해“설화성” 53) 이 생 겼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를“노년에 이르면 삶의 긴장을 풀고 다시 동심의 눈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연스런 심정의 소산” 54) 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오광수는 유영국이 1978년에 옮긴 등촌동 작업실이 햇빛이 풍성하고 나무를 많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시 기 작품에 나무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였다. 55) 이인범은 1970년대 말 이후 유영국이 한층 “자연 친화적인 태도” 56) 를 보인다고 하면서 작가의 거듭된 수술 등의 건강 악화를 그 이유 로 꼽았다. 57)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표 49) 박서보, “이우환에 관한 일”, 「공간」, 제100호, 1975. 9, p.40, 참고. 50) 박서보, “이우환과의 만남: 68년 이후를 회상하 다”, 「화랑」, 제 45호, 1984, 가을, p.32, Joan Kee, 위의 논문,  p.44, 재인용. 51) 윤명로, “모더니스트의 죽음”, 『유영국 1주기전 도록』, 갤러리 현대,  2003, 페이지 없음. 52) 이경성, “원로가 증언하는 20세기 한국미술, 자유 전에서 신상회까지”, 「월간미술」,  1996. 10, p.71. 53) 이경성, “유영국론”, p.41. 54) 위의 글, p.44. 55) 오광수, “유영국론”, 『유영국 도록』, 1979, 국립현대미술관, 페이지 없음. 56) 이인범, “유영국, 한국 추상미술 재해석의 단서”, p.81. 57) 유영국의 차녀 유자야의 기억에 따르면, 유영국은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의 큰 수술을 받았고, 작은 수술까지 합치면 총 열 세 번 정도의 수술을 받았 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1975년 심장 협심증 때 문에 수술한 것을 시작으로 1977년에는 심근경색, 1980년에는 고관절, 1982에는 심장 수술을 받았 다. 그리고 1983년에는 심장 박동기가썩어서재수 술을받아야했고, 1985년에도 심장과 관련된 대규 모의 수술을 받았다. “유자야의 기억”, 『유영국 저 널』, 제5권, 유영국미술문화재단, 2008, pp.148- 182, 참고. 8. Work 1978년, 캔버스에 유채, 91x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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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출이라는 것이다. 유영국의 회화에서 구체적인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위와 같은 여러 원 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당시 한국미술과 국제 미술의 큰 흐름이었던 ‘구상성의 회복’현상과도 연관 지을 수 있다. 프랑스의 신구상주의(Nouvelle Figuration), 미국의 새로운 이미지 회화( New Image Painting), 독일의 신표현주의(Neo- Expressionism),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 났던 구상 회화 경향이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의 화단에도 영향을 주었고, 앵포르멜 이후를 모색하고자 하는 다양한 실험이 행해지는 가운데 구상회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58) 그 단적인 예로 극사실 회화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하나의 집단적 움직임을 형성했으며, 1980년대에는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사회비판적 내용을 담아내는 경향도 나타났다. 유영국 의 작품에서 구상적인 요소가 부각되는 것이 화단의 이러한 전반적인 경향과 시기적으로 일 치하는 것은 그의 작업 역시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다만, 유영국은 기 존화단에 대한 반발이나 사회적인 참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고, 순수한 조형적인 측면에서 당시 한국 화단이 보였던 구상에의 관심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영국의 작업에서 이처럼 구상성이 부각됨에도 그의 작품을‘추상화’라고 부 를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관심이 외부 대상의 묘사보다는, 화면 안에서의 조화에 있었기 때문 이다. 또한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작품 제목을 모두 <Work>로 변경하여 전시 한 후부터 유영국은 대부분의 작품에 < Work>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그의 작업의 우선 적인 목표가 작품의 대상이었던 자연을 알아볼 수 있게 표현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려주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 공간감과 사실성, 즉 구상성이 부각되는 이 시기에도 유영국 에게 자연은 작가의 주관적 세계나 화면의 조형성을 나타내기 위한 매개체였다는 점은 이전 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처럼 구상성과 추상성이 공존하는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자신의 조형적 관심을 잃지 않으면서 국내외의 미술 동향에 적절한 반응을 보인 유영국의 태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도‘다원주의(pluralism)’의 시기였던 1990년대에 한국의 미 술가들은 평면과 입체를 넘어 일회적인 성격의 설치나 퍼포먼스 등을 활용하여 기존 미술형 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면서‘탈장르’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유영국은 이러한 최 신의 미술 경향을 자신의 회화에 모두 적용시키지는 않았다. 그는“새로운 미술의 형식과 매체에 대해 시대가 그렇다면 할 수도 있다는 것, 시험적으로 그렇게 해보고 그것을 바탕으 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면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새로운 미술 형식에 대해서 열린 태 58) 1978년 출범한 민전의 하나인‘동아미술제’가‘새 로운 형상성’을 제시하였고, 이는 추상일변도의 경 직된 미술계 구조를 벗어나 다양한 양식과 이념을 공존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1970 년대 후반에 문을 연 서울미술관은‘오늘의 유럽 미술전’이나‘프랑스 신구상 회화전’등을 통해 프 랑스 신구상 작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했 고 , 이는 한국미술에서‘형상’을 복구시키는 촉매 제가 되었다. 최우석, “1980년대 한국 미술의 양 상”, 「고황논집」, 제 36호, 경희 대학교 대학원, 2005, pp.153-15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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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제8집 | 2012 도를 보였으나, 동시대의 미술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것은 경계하였다. 다양한 현대 미술 의 실험들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회화 세계를 유 지한 것은 유영국이 자신의 예술관에 부합하는 경향만을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선별적으 로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동시대의 국제적인 경향들과 이를 수용한 당대 한국미 술의 실험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이를 자신만의 예술적 필터로 걸러서 수용하였던 것 이다. IV. 결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전역에서는 빠른 근대화를 이루어 국제 사회의 흐름에 발맞추어야 한다는 의식이 가득했다. 미술계 안에서도 미술의‘국제화’와‘현대화’는 비슷한 개념으로 간주되었고, 서구미술의 양식들은 화단에 빠르게 유입되었다. 한국의 미술가들은 이를 적 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해방 이후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도 부응해야 했는데, 이러한 외래의 문화와 자국의 전통 사이에서 비롯된 갈등에 대한 해결책 으로 유영국은 서구 미술의 조형 어법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 우리 문화의 전통을 담아내 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서구 추상미술을 학습한 한국 추상미술 의1세대로서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구의 추상 형식을 한국의 토양에 맞는 방식으로 해석하여 정착시켰다.  본고는 유영국이 동양예술의 핵심적 가치를 기반으로 서양의 미술 양식을 자기화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측면에 주목하였고, 그의 작품이 당대의 사회와 맺은 대응관계를 살피 며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기존 연구자들이 유영국 작품의 형식적인 특성에 집중하여 시기를 구분한 것을 수정한 것으로, 그간 독자적인 개체로서 묘 사되었던 유영국을 다시 시대의 문맥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다. 유영국은 해방 직 후 한국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여 일본 유학시절 몰두하였던 순수 추상 의 화면에 동양적인 소재로 간주되는 자연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그 후 앵포르멜, 기하추상, 구상회화 등과 같이 한국 현대 미술의 각 시기를 대표하는 특정 경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서 작품에 변화를 주었다. 즉, 그는 시대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면서 동시대 예술가들 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으며 새로운 미술형식이 갖는 가능성을 열린 자세로 수용했던 예술가 였다.  유영국의 작품 세계에는 각 시기마다 특징적인 성격이 발견되는 동시에 전체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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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큰 줄기 또한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의 회화의 통합적인 측면이다. 이 는 서양에서는 대립 항으로 여겨지던 개념들인 추상과 구상, 이성과 감성이 하나의 화면 안 에 종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구체적인 대상인 자연이 추상의 화면에 투영된 점, 견고한 구 조 위에 회화적인 제스처가 드러난 점, 이성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기하추상에 서정성을 불어 넣은 점, 그리고 구상성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추상성을 유지한 점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된다.  본고는 이와 같은 통합성을 동양의 예술관에 의해서 설명하였다. 유영국은 당시 한 국에서는 생소했던 서양의 추상 형식에 동양 미술의 중심소재였던 자연을 덧입혀 한국적 으로 소화시켰고, 형과 사, 지와 정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던 동양의 예술관에 기대 어 이들을 그의 회화 안에서 종합하였다. 다시 말해 유영국의 추상회화는 동양의 예술관에 뿌리를 두고, 새로 유입된 서양의 미술 경향을 접하여 탄생한 새로운 문화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유영국의 작품이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개인의 독특한 양식이 라는 사실은 그의 작업을 동양이나 서양식의 어느 하나로는 해석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그 의 작품은 자체적으로 생성된 한국의 고유한 양식이라 할 수 없으며, 서구의 모방으로 치부 할 수도 없다. 그것은 한 예술가의 개인적 경험과 외부 맥락과의 관계 맺음에서 생성된 독특 한 개인의 양식이자 다양한 층이 교차하는 문화 교류의 장이다.  예술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특정 시대에서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한 나라의 문화 또한 외부와의 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이 교 차하는 혼성의 장이다. 유영국은 특정 시대와 사회라는 문맥 안에서 국내외의 미술과 적극 적으로 소통하면서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가치관을 구현했다. 그의 작품은 예술가 개인의 삶의 체험에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융합되어 형성된 개인의 독특한 양식이라 는 데에서 그 미술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의 과정과 특성 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본인 유영국의 작품을 분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는 데에서 본 논문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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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제8집 | 2012 1.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 약력 1897년에 출생하였다. 1) 1912년 삿포로의 구제(舊制) 사립중학교인 홋카이중학(北海中學, 현 北海高校)에 입학했다. 2) 1913년 같은 학교 2학년 때에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미술교사 세키 세이이치(關 精一)가 부임하여 그로부터 유화와 수채화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3) 1914 년 니헤이 토(二甁 等), 4) 야마다 타다아키(山田忠郞), 쿠마가야 타케지로(熊谷武二郞) 등 네 사람이 회화 모임인 돈구리카이(團栗會)를 결성하고 같은 학교 교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 다. 1915년에는 처음으로 교외에서《제1회 돈구리카이텐團栗會展)》(9월3일~5일, 로리관 (ロ-リ-館), 삿포로)을 개최했다(도판 1).  1916년 중학교 졸업 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5) 도쿄미술학교 졸업생 명부 6) 에 따르면, 사에키 유죠(佐伯祐三),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그리고 돈쿠라카이의 친구인 니헤이 토와 함께 1923년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니헤이 토는 일단 예비과에 입학하였으나 퇴교하고 1918년에 다시 입학하였다.7) 사토에게도 무슨 사정 때문인지 졸업까지 7년이 걸 렸다.  사토는 사에키, 야마다와 함께 바라몬카이(薔薇門會)를 결성하여 1923년에 제1회전 ( 5월9일-13일, 도쿄 분보도(文房堂))을 개최하였다. 바라몬카이 제2회전은 1924년에 경성 (京城)의 일본생명빌딩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는 야마다 신이치가 1923년11월에 경성으로 이주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8) 사토의 경성 이주 시기는 애매하다. 그런 데, 1927년에는 제2회《조선미술협회전(朝鮮美術協會展》, (야마다 신이치, 히요시 마모루 (日吉守), 토다 카즈오(遠田運雄) 등이 1925년에 결성)의 새로운 동인(同人)으로 이름을 올 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京城日報』 1927년 6월 6일자), 이 시점에는 이미 조선으로 돈구리카이(團栗會)와《제2고보전》: 미술교사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의활동배경 이우치 가츠에(井內佳津惠) | 일본 홋카이도아사카와미술관(北海道立旭川美術館) 학예과장 1) 장욱진 미술관 www.changucchin-museum.com/book/book- subll.asp에 따름. 2) 홋카이 중학교 졸업년도 다음부터 역산 3) 이하, 홋카이 중학 재학 중의 동향에 대해서는, 니 헤이 토우(二甁 等) 「돈구리가이 창립 즈음」(『돈구 리가이 65주년기념전 목록』, 홋가이고등학교미술 부, 1975년)에 따름. 4) 二甁德松(니헤이 토쿠마츠) • 二甁等觀(니헤이 토우칸) 5) 홋카이중학 학내지,『교우가쿠카이시(協學會誌)』 1916년8월의 졸업생 동향의 기사에 따름. 6) 『도쿄미술학교 도쿄예술대학동창명부』, 도쿄예술 대학, 1967년(홋가이도립근대미술관장서) 7) 「늘 이름을 바꾸는 미술가 니헤이 토우칸(二甁等 觀)」 http://chinchico.blog.so-net.ne.jp에 따름 8) 「山田新一年譜」(『畵業70年の軌跡 山田新一展』,  宮崎縣立美術館, 2002년)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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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건너 왔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야마다 신이치의 유럽행과 더불어 조선미술협회연구소에서 지도를 담당하였다(『京 城日報』1927년9월29일). 1928년에는 제2고등보통학교(第二高等普通學校) 교사 직함을 가지게 되었으며(『京城日報』 1928년5월2일자), 사토 쿠니오의 지도로《제2고등보통학교 양화전》( 12월1일-2일, 제2고등보통학교)을 조직하고, 홍우백(洪祐伯), 사토 쿠니오, 야마 다 신이치, 시미즈 세츠기(淸水節義), 마에다 킨시치(前田金七), 오오다 키조우(多田毅三), 히요시 마모루, 토다 카즈오 등이 찬조 출품하였다(『京城日報』1928년2월2일자). 1929 년에는 경성치과의전(京城齒科醫專) 미술부 주최《전선중등학교미술전(全鮮中等學校美術 展)》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이 전시는 후에《선만중등학교미술전(鮮滿中等學校美術展》으 로 확대됨). 이 해에는 오오다 키조우, 카타야마 히로시(片山坦) 등과 더불어 조선예술사연 구소(朝鮮藝術史硏究所)를 발족시키고 제1회《시작전(試作展)》(『京城日報』11월 21일자)도 개최하였다(『京城日報』 1929년5월15일자, 5월29일자, 11월21일자).  1942년에 병으로 쓰러지기까지 교편을 잡았으며, 유영국(劉永國, 1916-2002), 장 욱진(張旭鎭, 1917-1990), 임완규(林完奎, 1918-2003), 김창억, 이대원(李大源, 1921- 2005), 권옥연(權玉淵 1923-2011) 등 해방 후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가게 되는 뛰어난 재 원들을 여럿 제자로 배출하였다. 미술가로서는《조선미술전람회》외에도 조선창작판화협 회(朝鮮創作版畵協會)9) 와 도쿄미술학교 출신들에 의한 레이란카이(儷蘭會) 10) 등 활발한 활동모습이 엿보인다. 2. 사토 쿠니오와 제2고보 미술부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사토 쿠니오가 한반도에서 뛰어난 미술가들을 키우는 존재가 된 배경 으로서 그 스스로의 중학생 시절의 미술 체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문부성미술전람 회》제1회전이 개최된 다음 해인 1908년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 현 홋가이도대학 北海 道大學)에서 영어교사인 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郞)를 중심으로 미술단체인 쿠로유리카이 (黑百合會)가 결성되었다. 11) 쿠로유리카이는 첫 회부터 삿포로 시내에서 폭넓게 시민들에 게 공개된 스타일로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2) 아리시마가 동인이었던『시라카바(白樺)』가 도 쿄에서 전시했던 인상파 복제화를 소개한다든지(제 4회전, 1911년), 로댕의 브론즈를 참고 전시하는(제 5회전, 1912년) 등 당시 삿포로의 청년층에게 폭넓게 예술적 자극을 주었고, 삿 포로에서 문화운동을 견인하는 존재였다. 1912년의 제5회전은 삿포로중학(札幌中學, 현 삿 9) 조선창작판화협회(朝鮮創作版畵協會). 1929년, 사토 테이치(佐藤貞一), 하야카와 소우센(早川草 仙), 오오다 키조우 등이 결성(京城日報』1929년 11월12일자). 10) 레이란카이(儷蘭會). 1930년 제1회전 개최(『京城 日報』 1930년 11월 21일자). 토다 카즈오, 이시구 로 요시야(石黑義保), 사토 쿠니오, 야마구치 다케 오(山口長男)), 후에 1933년 청구회(靑邱會) 결성 (『京城日報』 1933년10월26일자). 이시구로 요시 야, 토다 카즈오, 사토 구니오, 야마구치 다케오, 공진형(孔鎭衡),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그 뒤에는 다케다(竹田), 박(朴), 와타나베(渡邊, 경 성 체재), 토바리(戶張, 조각)도 가입했다. 11) 이하, 쿠로유리카이(黑白合會)에 대한 기술은 콘 다 케이이치(今田敬一) 『北海道美術史』(北海道立 美術館、1967년)에 의함. 12) 제1회전은 카이라쿠엔요우칸(偕樂園洋館, 오늘날 의 세이카테이(淸華亭))에서 10월27일 하루 동안 만 개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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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제8집 | 2012 포로남고등학교(札幌南高校)), 홋카이도사범대학(北海道師範大學, 현 홋가이도교육대학 (北海道敎育大學))의 학생 작품 44점을 같이 전시하고, 삿포로 시내의 다른 학교 학생들의 예술활동에 눈길을 주는 시야의 넓이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이 커다란 자극이 되어 1914년에는 홋카이도사범대학의 <노마카이(野馬會)>, 삿포로 중학의 <카스미카이(霞會)>, <료쿠세이카이(綠星會)>, 홋카이중학(北海中學)의 <돈구리카이> 등이 함께 참가했던《삿포 로연합양화전람회(札幌連合洋畵展覽會)》(삿포로시계탑(札幌時計台), 10월 3일-4일)에 개 최되기에 이르고 있다(『홋카이타임즈(北海タイムス)』 1914년10월3일자, 10월6일자). 아 마도 이러한 삿포로에서의 중학생 시절 미술부 활동이 커다란 계기가 되어 사토 쿠니오에게 도쿄미술학교 진학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사토 쿠니오가 경성의 제2고등보 통학교에 부임 후 교내에서는《제 2고보전(第二高普展)》을 조직하고 또한 보다 넓게《전선중 등학교미술전(全鮮中等學校美術展)》등의 움직임에도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특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2고등보통학교 학 생으로서 사토 쿠니오의 가르침을 받고 한국의 현대 미술계를 이끌었던 유영국을 비롯한 미 술가들이 해방 이후 1960년대에 이구회(二九會)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3) 이는 제2고등보통학교 명칭에서‘이(二)’를 사토 쿠니오의 이름 중에서‘구(九)’를 따와서 이름붙인 것으로, 미술교사 사토 쿠니오에 대한 존경심과 추모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미술계가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향하는 시대의 흐름 가운데에서 사 토 쿠니오가 이룩한 역할은 앞으로 검증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13) 이구회(二九會)의 존재에 대해서는, 2011년4월 18일, 서울에서 연구회 개최시 이인범(상명대학교 교수)로부터 전해들음. 제1회 <돈구리카이전(團栗會展)>에서 돈구리카이 회원들, 뒷줄 오른쪽이 사토 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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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3. 이후 조사의 방향 홋카이고교(北海高校)에는 사토 쿠니오가 쓴 글이 게재된『교우가쿠카이시(協學會誌)』가 보 존되고 있으며, 사토 쿠니오의 중학생 시절에 대해서는 이러한 문헌에서 족적을 좇을 수 있 다. 한국에서도 경복고등학교(제2고등보통학교의 후신)에 제이고보(第二高普) 시대의 문헌 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면, 현 시점에서는『경성일보(京城日報)』의 기사에서만 파악할 수 밖에 없는 제2고등보통학교 미술부의 활동을 더욱 상세하게 찾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까 생각된다. 또한 현재 일본 국내에서 확인 가능한 사토 쿠니오의 작품은 도쿄미술학교의 졸업작품뿐이지만, 니헤이 토우 등 홋카이중학 이후 친구들과 유족들에게 사토의 작품이 남겨져 있는지 조사해 볼만한 여지는 있을 것이다. 한국에 사토 쿠니오의 작품이 현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조사가 가능하다면 미술가 및 교육자로서의 사토 쿠니오 검증이 이어지리라 생각된다. 번역/임성진(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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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제8집 | 2012 I. 한국 모더니즘의 첫 장을 연‘추상화가’, ‘한국 추상의 선구자’, ‘한국 최고의 추상작가’, ‘한국 추상의 거목’이라는 수식으로 평가되어 온 유영국은 한국에서‘아방가르드’를 다룰 때, 그를 빼놓고 서술할 수는 없다. 서세동점의 변혁기에 낯선 재료와 표현방식으로서의 서 양미술이 유입된 이래 수년 동안 한국화단에서 추구되어 왔던 재현적 표현방식을 부정한 채 추상미술로 전 예술생애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이른바‘추상’미술은 곧‘현대’미술로 등식화되어 왔는데, 이는‘부정’의 미학으로서의 아방가르드(Avant- Garde,Vanguard)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한국의 경우, 과거에 대한 철저한 비 판과 부정, 아울러 변화 및 미래의 가치들에 일정한 헌신을 함축하는 모더니티의 구상이 아 방가르드라는 논쟁적인 개념과 동일시되어 전개되었던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20세기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제도화된 예술과 그것의 자 율성을 부정하며 예술과 삶의 통합을 지향해 왔다. 이 때‘부정’의 대상 중 하나인 제도화된 그것으로서의‘전통’이1970년대 한국미술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부정이 아닌‘긍정’의 대 상이자 아방가르드 전략으로서 어떻게 포섭되고 있는가는 주목할 만하다.  1970년대 역시 관습적으로 추상미술은 곧 현대미술이었던 시기였다. 이른바 아방가 르드로서의 위치였던 것이다. 다만, 줄곧‘서구’‘현대미술’의 한 경향으로서 마땅히 추수 해야 할 가치로서의‘추상’미술이 아닌, 한국의‘전통’과 만나는‘아방가르드’로서의‘추 상’이라는 이율배반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이에 대해 미술비평가 김윤수는“최근 일부에서 는 전통예술과의 활발한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 거부라는 전위 본래의 논리에 어긋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근대예술이 서구예술의 세례를 유영국의 1970년대 작품에 대한 단상: 아방가르드 VS=전통? 김주원 |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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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1) 김윤수, 「前衛藝術은퇴폐가아니다」, 『동아일보』, 1973. 1. 23  2)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김미경, 「전통과 아방가르드: 1950년대-60년대 유영국」(『유영국저널』, 제7집, 유영국미술문화재단,2010,88-101쪽)에서도관점 을 달리하여 다뤄진바 있다. 3) 이인범, 『유영국의 초기추상』,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2000 받는 동안 전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던 사정에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어 서 전통예술과의“접촉은 현재로썬 실험적인 성격을”띠었으되“그러한 경향은 우리 예술의 탈서구화를 위해서나 전통의 긍정적 계승을 위해서나 감성의 확대와 갱신을 위해서도 응분 의 당위성을 지닌다.”고 역설한다.1) 유영국 역시 1970년을 전후로 하여 그간 화면에 끌어들였던 자연과 더불어, 부정의 대상이던‘전통’의 문제를 그 특유의 추상적 감수성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2) 그러나 유영국 의1970년대 작품에 나타나는 단편적 양상으로서의‘전통’의 문제가“누구보다도 아방가 르드적 입장에 서왔으며 화단의 고식적 틀을 벗어던지고자 했던” 3) 그에게 어떤 성격인지, 또한‘한국적 모더니즘’이라 일컬어지는 한국 단색화 등의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양상 속에 서 아방가르드 VS 전통인지, 아방가르드=전통인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 다. 이 글은 이에 대한 시론적 성격을 띤다.  II. 1970년대 한국미술계는 1960년대와는 차별화된 전위의식이 고취되었다. 1970년대에 중 요한 화두는‘전통’, ‘전통예술’이었다. ‘전통’은“박정희 정권의 전체주의 강화를 합리화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4.19세대의 진보적 민주주의의 다양한 실천들이 밀고 당기는 치열 한 투쟁의 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 있는 우리 예술인들이 서구 근 대의 합리주의를 넘어선 현대성을 구현하는 중요한 근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식민지 침탈 이전부터 계승된 전통예술에 대한 발굴, 재조명, 보호, 연구, 계승, 재창 조 등이 이 시대에 활발하게 이뤄졌고”“한국성, 동양성과 현대성을 결합하는 여러 작품적 시도가”사유와 실험의 다양성의 폭을 넓혀 주었다. 4) 이 변화양상에는 1960년대와의 연결성이 간과될 수 없다. 실제로 1970년대 한국미 술의 중요한 이슈와 새로운 문제의식들은 1960년대와의 관계 속에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었다. 1960년대에《상파울로 비엔날레》《파리청년작가 비엔날레》와《한국현대회화전》등의 국제전 한국 참가, 본격적인 해외교류전 등은 1970년대 들어 한국미술계에서 팽배되는 한 국적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의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김윤수의 말대로 동시대 서구미술을 지향하던“기왕의 전위예술에 대한 반성과 함께 보다 폭넓고 다양한 실현이 요청”되게 하였 던 것이다. 5) 4) 이영미, 「총론」, 『한국현대예술사대계 IV-1970년 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엮음,  시공사, 2005, 26쪽 5) 김윤수, 「前衛藝術은퇴폐가아니다」, 『동아일보』, 1973. 1. 23 지붕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34x13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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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제8집 | 2012 “과거 십수세기간에 있어 한국은 동양의 정신적 특성을 그 본질의 상태에서 유지해온 가장 순결한 지역이었음을 다시한번 다짐하면서 우리들은 여기에 오늘의 조각과 판화 를 포함한 회화의 일단면을 세계적인 시야 속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광영을 가진다.  1945년 이후, 엄밀히 말하여 50년의 한국동란이후 우리의 예술은 그것이 조형예술에 관한 한, 생의 본질은 기성질서나 관념의 좌절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절박한 신념 밑 에 추진되어 있으며, 또한 좌절이 파생하는 가지가지의 시련 앞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련은 우리들이 앞으로 국제적인 흐름에서 성취해 나가야 할 내면적 사명에 서 본다면 한갓 부수적인 성장의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서, 액션과 우연과 물질의 한계에 다다른 오늘의 시점에서‘우리들은 무엇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보다 뚜렷한 공 유의 윤리의식이 하나의 유니크한 공간의 실현을 향하여 비약의 계기를 노리게 하고 있 는 것이다. (…중략…) 우리들의 이러한 염원의 단면이 보다 넓은 시점에서 어떻게 반영 될 것인가?”-김병기6) 1963년 제7회《상파울로 비엔날레》(1963. 9. 23-1964. 1. 8)에는 유영국을 비롯하여 김영 주, 김환기, 김기창, 서세옥, 유강렬, 한용진, 서울공대 및 홍대 건축과 학생들이 함께 출품 했다. 작가들은 당시 화단중심에 서있던 김환기가 선정했다. 7) 출품작가들은 비엔날레 출품에 앞서 같은 해 6월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중앙공보 관에서 전시를 가졌다. 제 7회《상파울로 비엔날레》는 파리에 유학중이었던 박서보 등이 1961년 제2회《파리청년작가 비엔날레》에 현지에서 자력 참가한 후 두 번째 국제 전시 참 가였다. 이 전시의 참가 의미를 위와 같이 피력하고 있는 김병기의 글에서 당시 한국 미술계 의 주요 관심사가 무엇으로 향하는지 가늠하게 한다. 예컨대, “우리들은 여기에 오늘의 조 각과 판화를 포함한 회화의 일단면을 세계적인 시야 속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광영을 가진다.”“오늘의 시점에서‘우리들은 무엇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보다 뚜렷한 공 유의 윤리의식”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기초로“하나의 유니크한 공간의 실현을 향하여 비약의 계기를 노리게 하고 있는 것”등의 발언은 본격적인 국제미술전 참가로 세계 미술계 와의 교통을 통해 한국미술의 정체성구성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요청됨을 알 수 있다.  이 전시 후, 한국미술계에 또 하나의 문제적 전시로서 1968년 동경국립근대미술관 에서 열린《한국현대회화전》( 1968. 7. 19- 9. 1)을 꼽을 수 있다. 이 전시는“국제적 규모의 첫 대대적인 단독 전시회” 8) 로 역시 유영국을 비롯하여 김영주, 김환기, 권옥연, 박서보, 윤 명로 등과 곽인식, 이우환 등의 재일, 남관 등의 재불 작가가 참가하였다.9) 도쿄국립근대미 6) 김병기, 「카탈로그 서문」, (전정수 정리, 「국제전 참 가작가와 작품 및 카달로그 서문- 1963-1977」, 『한국의 근대미술』제 4 호, 1977, 23쪽) ; 이인범, 앞의 책,  155쪽 재인용. 7) 당시 김환기는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을 통합하여 만든 한국미술협회 회장과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으로 화단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8) 이일, 「출품작가 선정 경위」, 『공간』,  1968. 7 ., 51쪽 9) 출품작가는 최순우, 이경성, 유준상, 이일, 임영방 등이 선정하였다. 산 1975년, 캔버스에 유채, 61x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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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술관에서 발행하는 뉴스지에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전시 오픈 직전인 7월17일 좌담회 가 열렸고 당시 이우환은‘한국현대미술에는 오프적 경향이 강하나 논리적으로 취급되어진 것은 아니고 비상히 단순한 색을 좋아하는 민족적인 기호가 예전부터 잘 음미되어져 왔기 때문이며 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추구해간다면 한국적인 특수 한 양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10) 혼마 마사요시(本間正義)의 인 용을 통해 확인되는 이우환의 발언 역시‘한국적인 특수한 양식’의 요구로 모아지고 있다.  III. 한편, 1960년대의 이들 국제전람회 출품을 둘러싼 구상과 추상 진영 간의 있었던 논쟁도 국 제전람회를 통한 국제 사회와의 접촉이 한국현대미술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 주었음을 예증 하는 사례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이른바 서양의 근대적 성격의 미술이 유입되기 시작 한1910년대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시기에, 한국은 국제적인 입장에서 자기미술을 되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11)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현대미술의 국제사회로의 진출은 자신 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자각을 자극받는 계기였으며 한국미술의 정체성( identity) 모색의 과제가 부각되는 근거를 제공받은 셈이었다. 여기에서‘한국성’이라는 지역적인 특 수성과‘국제성’이라는 국제적인 동시성 혹은 동질성이 활발한 논의의 초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2) 1960년대 초에 촉발된 미술계 내의 이러한 분위기는 1970년대를 전후하여 아방가 르드와‘전통’의 조우를 가속화 시켰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한국현대미술은 1950년대 말경을 전후해서 태동한다. 이 시기에 우 리나라 미술은 보다 다변화된 세계미술의 수용과 실험적 탐구를 시도하면서, 그 과정에 있어 서구미술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와같은 동향이 다 분히 서구 지향적 성격의 미술임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와같은 경향에 종지부를 찍고 발상에 있어서나 또 방법론적 사고에 있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 전통에 일군의 화가들이 눈뜨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의 일이 다.-이일13) “현대미술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유독‘한국’이라는 머리글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10) 本間正義, 「한국현대회화전을 보고」(『공간』, 1968. 7., 74-75쪽)과 김미경, 앞의 글, 98쪽을 참고할 것. 11) 오광수, 「해외교류전의 성과와 반성」, 『계간미술』 34호, 1985년 여름호, 73쪽 12) 김주원, 「1960년대 한국미술에서‘구상추상논쟁’ 과‘리얼리티’의 문제」( 1977), 『미술사학보』, 미술 사학연구회,  2011, 6, 20쪽 “국제전이란 말할 나위도 없이 다양한 지역의 미술 이 갖는 특수한 사정과 성격 그리고 동시대 미술이 지향하는 국제 보편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자리이 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전이 갖는 기본적인 성격으 로 볼 때 전후 각종 국제전이 거둔 성과는 지역 간 의 문화교류와 인류공통의 염원에 대한 문화적 상 상력을 배양시킨 터전으로서 확고한 이미지를 다 졌다고 볼 수 있겠다.”오광수, 같은 글, 73쪽 13) 이일, 「서양으로부터의 영향(影響)에 의한 변용(變 容)과 아시아미술의 전통(傳統)과 앞으로의 과제 (課題)-《아시아미술전 제2부: 아시아현대미술전》 ( 1981. 11. 1-30, 후쿠오카시립미술관) 기념심포 지엄 한국현대미술 주제발표문」, 『공간』제 163호, 1981. 1., 55쪽 산 1976년, 캔버스에 유채, 65x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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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제8집 | 2012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의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무엇 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로 제기된 것은‘한국’이라는 전제에 앞서 어떻게든 우리 의 산 미술이‘현대’미술이어야 했다는데 있었다.”-이일14) 위에서 언급한《상파울로 비엔날레》와《한국현대회화전》두 전시 모두 유영국이 참가한 국 제전람회였다.  두 전시가 유영국 작품경향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위의 두 전시 참가 후인 1970년대 들어 유영국에 있어서‘전통’에 대한 각성과 이에따 른 변화의 조짐이 두드러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영국의 작품에서‘전통’의 문제는 “오히려 그것은 정신적‘원천’의 재발견이며‘범자연주의적’자연관에로의 회귀” 15) 로서의 문제였던 1970년대 단색화가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영국은 1963년《상파울로 비엔날레》에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 후 출품작품 들이 반환되지 않아 구체적인 디테일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당시『조선일보』( 1963. 5. 23.) 와『경향신문』( 1963. 12. 4.)이 싣고 있는 유영국의 작품 흑백도판 <숲>(1963, 재료, 크기 미상)과 <산>( 1963, 재료, 크기 미상)은 그 경향을 짐작하게 한다. <숲>은 물질감과 텍스추 어가 두터운 듯 보이나 몰형식적인 추상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산>은 기하학적이고 구성주의적인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1968년《한국현대회화전》당시 유영국의 작품 경향은 엄정하게 중첩된 기하학적 구성에 순도 높은 색채의 변주가 돋보인다.16) 이 같은 작업 경향은1970년을 전후로“건축적이고 짜임새가 있다기 보다는 산 또는 14) 이일, 「현대미술과 오늘의 한국미술-그 창조성과 모방성」( 1977), 『한국미술, 그 오늘의 얼굴』, 공간 사,  1982, 121쪽 15) 이일, 같은 글, 55쪽 참조 16) 유영국의 1960년대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인범, 「 1963-1968년 유영국의 작품들」, 『유영국저널』 제 6집, 2009, 5-26쪽을 보라.  일월도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05x1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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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숲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 17) 가 강조되는 것으로 변모하면서, 화면 안에 떠오르거나 지는 해, 기와지붕들, 산, 언덕, 달 등‘자연’적 모티프가 일면‘전통’회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 성되거나 전통적인 모티프들이 등장하고 있다. 더불어 또하나 눈에 띠는 현상은 화면 안의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 폭이 이전 보다 상당히 좁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앞서 참가한 국제미술전의 출품을 통한‘전통’에의 각성과 그의 악 화된 건강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국제사회와의 조우에서 자극받았던‘전통’의 문제와 더불어 당시 악화된 건강상태로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유영국이 이뤄내고 있는 아방가르드는 단순 한‘전통’의 문제를 떠나 가까운‘현실’에의 복귀, 현실에의 수용에 더욱 밀착되고 있는 것으 로 보인다. 예컨대, 조선시대 궁궐의 어좌(御座) 혹은 어진(御眞)이 걸린 뒤편에 설치되었던 병풍 <일월도(日月圖)>를 재해석한 작품 <일월도>(1975, 캔버스에 유채, 105x146cm)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송도기행첩』중 오관산 영통동 가는 길목을 그린 <영통동 입구>와 그 구성 방식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는 작품 <산>(1974, 캔버스에 유채, 크기 미상) 등은‘서구’‘현대미술’로서의‘추상’화가 유영국의 당시 한국 미술계의 화두로서의‘전 통’에의 각성과 그 실천적 모색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또한 마치 집 안에서 보이는 대문 밖 풍경처럼 포개진 지붕들, 봉우리들이 가깝게 보이는 산, 그 위로 떠오르는 해 등은 그간 그의 작업이 추구해 온 추상적 본질의 탐구라기보다는 유영국의 당시 일상과 그 조건들의 반영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1970년대 작품들에서 실천되고 있는 아방가르드가 아방가르 드 일반론적 저항의 미술이 아니라‘참가’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미술계와 작가 개인의 일상적“현실에의 복귀, 현실의 수용, 현실에의‘참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 나“이‘현실에의 복귀’또는‘구체적인 것의 재발견’은 그것이 단순히 추상미술 이전의 구 상적 세계의 계승이 아니라 과거의 조형적 딜레마에서의 해방과 새로운 미술표현의 가능성 개척이라는”아방가르드적 과제를“스스로에게 부과하는‘문제성’을 띠고 있는 것일 때 거 기에는 전위미술만이 갖는 고유의 변증법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18) 따라서 유영국의 1970년대 일군의 작품에서 보여지는‘전통’의 문제는‘현실’에의 복귀와 수용, 참가를 통 해 아방가르드로서의 변증법이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7)「강렬한 원색의 추상-서정적 향기 가득히」, 『경향 신문』, 1975, 11. 13.  18) 이일, 「전위미술론-그 변혁의 양상과 한계에 대한 시론(試論)」( 1969), 『현대미술의 시각-이일 미술 평론집』,  1989(3판), 미진사, 69쪽 산 1974년, 캔버스에 유채, 크기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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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제8집 | 2012 유영국화백 10주기 기념 에세이 자유정신과 자연을 향한‘랩소디’ 이인범| 상명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 I. 올해로 화가 유영국(劉英國, 1916-2002) 작고 10주기를 맞는다. 필자가 화가를 만난 것 은 1995년 가을이다. 일본 시즈오카미술관 주최로 열릴 <동아시아 회화의 근대>전의 큐 레이터로서 출품 교섭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 면식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 다 할 장식도 수사도 없이 과묵하게 살아온 한 화가의 존재 자체가 발하는 빛을 처음 자각 적으로 누린 것이 그 때라는 것이다. 나는 그때 척박하기만 하다고 여겼던 우리 화단에서 화가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경외심을 지닌 당당한 한 작가를 만 날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그 감동으로 그로부터 몇 년 지난 후 거칠게나마『유영 국과 초기추상』(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2000)을 단행본으로 펴냈다. 지난 2002년11월11일 저녁, 필자가 문안 차 서울의대 병동에 들러 침상 옆에 서 서 얼마 동안인가 시간이 지났을 때 한 화가의 시계가 멈췄다. 그 때 자신의 죽음을 맞고 있는 그 앞에 서있던 나에게 파노프스키가「인문학적 원리로서의 미술사The History of Art As a Humanistic Discipline」를 궁리하며 글 첫머리에서 전했던 일화가 문득 스쳐지 나갔다. 작고하기 9일 전 방문한 의사를 맞으며 가까스로 쇠잔한 몸을 일으켜 인사하며 철 학자 칸트가“인간으로서 자존심이 아직 나를 떠나지 않았다.”고 웅얼거렸다던 인상적인 외마디 말말이다.  그리고 어느덧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작고 후 화가를 기리고자 재단이 설립되었 고『유영국 저널』이라는 잡지가 여러 권 발간되었다. 그런데도 화가 유영국의 예술세계와 삶의 깊이에 다가서는 일은 여전히 녹녹치 않다. 본 원고는《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0주기전》 (2012. 5. 18-6. 17 갤러리현대 강남) 부대행사로 2013년5월25일에‘유영국의 삶과 추상예술: 자유정 신과 자연을 향한 랩소디’라는 제목으로 열린 특별강 연의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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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II. 화가 유영국의 예술세계를 이야기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예술은 내러티브를 허락하 지 않는 추상의 세계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역시 말이 없이 수도원의 수사같은 모습으로 살았 다. 그래서 그의 삶 역시 흔히 예술가들에게 따라붙게 마련인 일화도 신화적 기행도 발견하 기 어렵다. 그렇지만 유영국의 예술을 가로지르는 화두를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그의 회 화적 주제는‘자유’이다. 자유의식은 그로 하여금 삶과 예술에 의욕을 지피게 한 불씨였다.  유영국이 처음 예술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위치한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하면서이다. 나라가 식민화된 지 어언 4반세기에 이르고 일제에 의해 한반도 가 대륙 침략 병참기지로 군국화되어 가던 1935년 봄, 그는 억압적이고 비인격적인 상황에 염증을 느껴 재학 중이던 제 2고보를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자퇴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마도로 스를 꿈꾸며 요코하마상선학교에 진학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자신의 계획이 고보 중 퇴 학력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스럼없이 향한 곳이 예술학교였다. 그것 도 아카데믹한 국립 도쿄미술학교가 아니라 개명한 한 일본인 건축가가 세운 자유스런 학풍 의 문화학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같은 학교 졸업생인 추상화가 무라이 마사나리(村 井正誠) 등 몇몇 일본인 화가들과 이후 함께 동반하게 되는 문학수, 김병기, 이중섭 등을 만 났다.  항해사와 예술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에 있어서 넘나들 수 없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 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이를 오가며 예술의 길을 가고자 선택했다. 그렇듯이 청년 유영국 에게 예술은 그 끝이 닫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대양 육대주를 자유롭게 누비는 항해의 표 상과 오버랩되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고보시절 일본인 미술교사 화가 사토 쿠니오 (佐藤 九二男)와의 만남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는 화가 유영국 자신의 생전의 고백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삶의 현실이 부박하기 이를 데 없던 시절, 같은 선생의 영향 아래 그 외에도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이대원, 권옥연 같은 걸출한 화가 들이 배출되고 있다. 훗날 일제잔재에 대한 증오심이 이 나라를 지배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학창시절 자유인의 표상으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던 사토 쿠니오 선생 으로부터의 배움을 기리고자 제2고보와 선생의 이니셜을 따 함께《2·9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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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제8집 | 2012 III. 유영국의 미술계 데뷔작은 문화학원에 재학 중이던 1937년 초 도쿄에서 열린 제7회《독립 미술협회전》출풉작인 <랩소디>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구축주의 작가인 류보프 포보바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곧 이어 그는 같은 해 가을 아방가르드적인 추상 경향의 작가들이 중심이 된《자유미술가협회 창립전》에 참여하고 문화학원 동문들로 구성된 제 2회 《 NBG(Neo Beaux-arts Group)양화동인전》에 출품하며 1942년 봄까지 도쿄 체재기에는 줄곧 이 두 그룹전만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을 펼쳤다.  미술학교 진학에서부터 그랬듯이 애초부터《조선미전》, 일본의《문전》이나《제전》같 은 일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며 세속적인 출세를 담보해 주던 관전이나 미술제도는 그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 대신 유영국의 시선은 그 대척점에 있던 서구의 일련의 아방가르 드적인 동시대 미술동향으로 향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영국의 벤 니콜슨, 독일의 장 아르프, 프랑스 작가 장 엘리옹, 러시아의 류보프 포보바나 엘리츠키 등 서구 동시대 작가들의 추상 작업에 조응하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버려진 베니어합판이나 나무 조각, 하드 보드지, 골판지 등을 재료로 끌어들여 그 자체를 작품 구성 원리로 채택하는가 하면, 전위적 으로 물질성을 그대로 노출시키거나 릴리프나 콜라쥬 작업을 실험하며 검은 색, 회백, 흰색 의 무채색 페인트칠로 컬러를 제거하며 구축적인 추상을 모색하고 있다. 그 밖에도 회화, 삽 화, 사진작업 등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1931년 파리에서 열린 《추상-창조 Abstraction-Cration》전, 1936년 뉴욕MoMA에서 열린《입체주의와 추상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전, 1937년 런던에서 개최된《구축적 미술 Constructive Art》전 등의 서구 미술계의 정보에 민감하게 접속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도쿄 체재기의 유영국의 5년에 걸친 이러한 화단 활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사진을 제외한 모든 작업들은 철저하게 비대상적이다. 엄정하게 기하적 혹은 유기적인 형 상의 추상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한 결 같다. 그러한점에서는 도쿄 시절 마지막으로 출 품한 1942년 제6회《자유미술가협회전》에 경주 남산을 소재로 한 사진작업들도 예외가 아 니다. 그렇듯이 그는 20대 초반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추상 세계에 진입하고 있다.  유영국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까지 화단을 지배했던 재현미학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다. 알다시피 서구미술의 사실성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연암 박지원의 베이징 성당 벽화 관람 기록 등에서 확인되듯이 그 역사가 조선시대 중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며, 작품 R3 1938년(1979년 재제작), 65x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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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1930년대에 이르면 유화나 수채화 등 서구의 이질적인 재료나 기법이 토착화되며 사실적 묘사에서 더 나아가 향토적 소재주의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당대의 재현미학은 유영국에게 아예 관심 밖이거나 오히려 부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향토색을 내 세우지만 실은 세계 대공황 이후 국수주의로 내닫던 일본의 문화계나《퇴폐미술전》, 《독일 미술대전》등을 개최하며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로 내몰리던 나치 독일의 상황과 내밀한 관 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건대, 이 당시 화단의 재현미학은 결국 식민주의적 서 사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유영국은 세계사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보여준다. 《자유미술가협회전》이나《 NBG양화동인전》은 전체주의로부터 탈주를 열망하는 그 에게 만남의 공동체이자 해방구였다. 그리고 추상은 예술의욕과 자유정신이 교차되는 지점 에서 그가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이념이자 양식이었다. 작품에서 대상성이나 장식 적 성격을 철저히 배제시키며 그가 구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 는 제1세대 한국의 추상작가 대열을 함께 형성했으면서도 김환기의 경우와도 미묘한 차이 를 드러낸다. 김환기가 대상적인 회화와 비대상적인 회화를 오가며 조형주의적이고 구성주 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반면, 유영국의 경우는 오히려 해체적이며 구축적인 성격을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쿄시절에 공식적인 전시만으로도 무려 90여 점이 넘는 작품 발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때 거기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예 술 개념과 전문적인 예술가로서의 직업적 정체성이 유영국에 의해 확립되기 시작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그림을 사대부의 여기 정도로나 여기고 봉건적 신분질서나 관료주의가 여전 히 기승을 부리고 근대적인 의미의‘예술’개념이나‘예술가’의 직업적 정체성이 희미하던 시절, 그 어느 때보다도 혼돈스런 조건이었지만 한 인간의 실존적 무게가 온전히 실린 아트 프로페셔널이 성립되고 있다. IV. 유영국은 그것이 뿜어내는 자유의 표상만으로 예술에 발을 적시고 있다. 서구에서조차 예술 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자각되기 시작한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근대기에 들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유영국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책임 주체로서 자유 스런 인간을 열망하며 예술을 향하여 의욕을 지피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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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제8집 | 2012 그렇지만 1943년 봄 유영국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던《자유미술협회전》에 이전과 달리‘일본민족 노동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가 내걸리며 전시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짙게 풍기자 제7회전 출품은 포기한 채 도쿄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그리고 고향 울진으로 돌아온 이후 10여 년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작품 활동과는 절연한 채 보냈다. 예외가 있다 면, 그의 나에 32세 되던1948년4월 서울미대 교수로 취임하고자 상경하여 1·4후퇴로 다시 낙향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김환기, 이규상과 신사실파를 창립하고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 등이 가세하는 가운데 3회에 걸쳐 전시회를 개최한 것과 그리고 전쟁 발발로 무산되 고 만《 50년미술협회창립전》출품을 위한 작업이 그 전부였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과 정치 사회적 혼란을 거치는 이 기간, 즉 일본에서 귀국하는 20대 후반 이후 그의 나이39세 되던 해인 1955년6월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다시 작업에 돌입하게 되기까지 김기순과 결혼하여 리지, 진, 자야, 건 등 네 자녀를 출산했으며, 처음 귀향생활 약 5년간은 어업 등 가업에 종 사하고 6·25전쟁으로 다시 낙향한 후 상경하게 되는 1955년6월까지 4년 남짓 기간 동안 은 양조업을 일으켜 가계를 꾸리는 일에 시간을 썼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화가로서‘잃어버린 10년’이라며 한탄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화가로서의 유영국의 활동이 정지된 것은 아니다. 이 시기 작품으로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직선 있는 구도>(1949)과 최근 발굴된 1953년에 제작된 5점의 작품뿐이 지만 작품세계에는 의미있는 변화가 일고 있으며 신사실파( 1948년), 50년미술협회(1950 년) 등을 결성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작품들에서 우리는 도쿄 시절과 달리 그가 적극적으로 주변 삶의 경관과 자연을 소재로 채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선 있는 구도>은도쿄에서의 비대상적이고 구축적인 추상을 떠나 달, 나무, 꽃 등 자연 대상을 추상화하며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 기억을 환기시 키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일제잔재청산과 민족문화건설이라는 당대 문화계의 이슈를 반영 하고 있다. 그에 반해 1953년의 다섯작품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울진의 자연과 삶을 주 제로 삼고 있다. 다시 유영국이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 것은 1955년6월 상경 이후이다. 삶의 현실이 난파되고 사물의 체계가 뒤엉클어진 전쟁 직후의 서울에서 그는 두터운 재질감 을 드러내며 검고 굵은 윤곽선을 통해 구성적으로 주변으로부터 사물들을 구획지으며 시선 을 도시풍경 같은 삶의 세계와 일상적 사물들의 현실 자체에 집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전적 으로《국전》에 의존하며 파동을 불러일으키던 미술계에 모던 아트협회 결성을 주도하여 그 룹운동시대를 열며 우리 화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직선 있는 구도 1949년, 캔버스에 유채, 53x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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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유영국의 작품세계가 다시 한번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4·19, 5·16 혁명을 거쳐 196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주변 경관과 자연을 소재로 하되 도회 풍경보다는 주로 자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산에 집중하며 구성적 대상 접근의 흔적을 털 어내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양식으로 전면화된 서구의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에 호 응하며 인간의 실존이나 물질성 자체의 가능성을 일궈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그는 청년 기에 그랬듯이《모던 아트협회전》를 비롯해《현대작가초대전》, 《2·9전》, 《세계문화자유회 의전》, 《신구상회전》, 《상파울로비엔날레》등의 그룹전이나 기획전을 거점으로 하여 역동적 으로 펼치고 있다. 적극적인 작품활동에도 불구하고 화가 유영국이 개인전을 처음 여는 것은 그의 나이 50이 다 되어서인 1964년이다. 이순의 나이에 접어드는 이 시기부터 그는 그룹활동보다 개 인전이나 각종 기획전, 국제전을 중심으로 운동 차원에서 펼치던 작품활동에서 벗어나 무게 중심을 자기 세계의 심화로 옮기고 있다. <원>(1968), <산>(1968)같은 작품들은 자연의 본 질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지만 기하적 추상에 다시 몰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들은 매우 순도 높은 색가를 지닌 원색을 통해 우주적 풍경의 근원 질서 에 다가서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젊은 시절 도쿄에서의 작품 경향과도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 다. 이들은 전쟁으로 지연되었던 국민국가체제 수립이나 그와 더불어 국제화가 이슈로 제기 되던 제 3공화국 시절의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1972년경부터 유영국은 자연의 본질이나 그 추상성에 다가서려는 의도보 다는 감정이입을 통해 주변의 산야와 자연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77년 무렵부터 그는 주변의 일상과 자연에 더 가까이 관조적으로 다가간다. 그렇지만 거 기에 수직 혹은 수평의 직선이나 직사각 색면 등을 개입시켜 구조화시키며 자연과 인간, 자 연과 추상적 질서 사이의 관계의 균형을 취하고 있다.  유영국의 회화적 주제와 태도는 그 스스로의 개인적 삶 체험, 공동체의 정치 사회 경 제적 현실, 국내외 현대미술 동향 등에 따라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잃어버린 10년’ 을 거치며 다시 화가로서 작업에 돌입하는 과정에서 그가 회화적 주제로 채택하는 것은 다 름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삶의 터전이자 조건인 이 땅과 대지라는 사실은 어 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이념적이거나 절대적인 우주의 근 원을 투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상적인 주변 정경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가 하면 자연 질료와 인간의 실존이 교차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화적 기억을 혹은 새로운 삶 의 비젼을 열기도 하고 심적 거리를 통해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기도 한다. 계곡 1958년,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Work 1968년, 캔버스에 유채, 81x81cm 지붕 1974년, 캔버스에 유채, 65x91cm Wor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33x1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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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제8집 | 2012 해방 이후 그의 예술에서 독립된 나라의 대지와 자연은 그 핵심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화가 유영국의 10주기 기념으로 열리는 이번 현대화랑 전시는 그 가운데 그가 다시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하는 1955년 이후의 작업들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자 유의식에서 촉발된 그의 예술이 어느덧 부정의 변증법을 통한 구축적 성격만이 아니라 자신 이 몸담고 있는 자연과 주변 경관에 대한 적극적인 관계의 형식으로 발전되고 있는 작품들 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작업들은 청년기 도쿄에서와의 자유분방한 재료와 형식실험과는 달리 유화라는 매우 제한된 형식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는 재료 형상의 가능성 에 대한 모색과 더불어 행위의 에너지, 색채의 가능성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V. 전체주의가 폭력성을 드러내던 지난 세기에 유영국은 추상의 세계를 통해 식민화되어가는 삶의 조건에 저항하며 현실을 초극해내고자 기획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가 예술적 실천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늘 주거공간과 작업 스튜디오가 같은 집에 있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아침 8시면 자리 를 살림공간에서 작업실로 옮겼고, 정오가 되면 거기서 나와 저심식사를 했으며, 다시 저녁 6시까지 어김없이 일하는 기계같은 습관을 코드화하며 평생을 노동자같은 화가로 살았다. 그런가 하면, 《국전》을 거부하며《50년미술협회전》창립에 나선 그에게 당시 학장인 장발로 부터 전시 참여와 국립 서울대 미대 교수 사이에 선택을 요구받았을 때, 그는 거침없이 작가 로서 직장을 버리고 전시 참여를 택했다. 1965년에 취임한 홍익미대 교수자리도 애초의 약 속과 달리 과다하게 작업시간의 희생을 요구받자 4년 만에 단호하게 내던지고 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화가로서 자리매기는 데에 단호했으며 자신의 화업을 훼손시키는 어떤 외적 유혹이나 명예, 권력 돈 같은 어떤 세속적 가치에 종속되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작가들의 자발적 그룹운동을 통해 화단의 지형 변경을 시도하고자 하 는 데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국전 중심의 관료적인 화단 운 영에 맞서 신사실파, 50년미술협회,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등을 결성하는 데에 앞장섰다. 4·19 혁명기에는 미술계 혁신을 위해 진보적인 미술인들의 모임인 현대미술가연합의 대 표를 맡았으며, 이른바 개혁 국전으로 일컬어지는 5·16 직후의 제10회《국전》에는 적극적 으로 참여하는 등 예술 공동체의 지평을 여는 데에는 주저 없이 앞장섰다. 두 번의 참혹한 전쟁으로 인한‘잃어버린 10년’을 늘 회한으로 기억하고 살았지만, 막상 그는 그 시절에 놀 Work 1975년, 캔버스에 유채, 53x72.7cm Work 1976년, 캔버스에 유채, 60.6x7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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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랍게도 어업, 양조업에 종사하며 철저한 직업윤리에 바탕하여 경제적인 토대를 굳게 다지고 있다. 가계를 책임졌으며, 게다가 자신이 꿈꾸던 예술의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토대를 스스 로 일궈내고 있다. 그에 힘입어 그는 환갑이 되던 해인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최된 다섯 번째 개인전에서야 처음 그림 한 점을 팔았지만 그때까지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예술세계 를 펼쳐갈 수 있었다. 신분 질서가 엄존하던 때에 화가, 어부, 교수, 양조업자 등으로 종횡 으로 넘나드는 직업편력이나 어떤 일에 종사하든 그가 마주하고자했던 세계를 향한 신념 과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에서 화가 유영국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인 그 자체였다. 이러한 화가 유영국의 삶의 태도와 작품세계야 말로 그와 더불어 동반했던 여타의 여러 화가들과 그를 확연하게 구분시켜 준다. 이러한 모습은 예컨대, 함께 추상미술에 가담 했던 세 살 연상의 화가 김환기, 중학시절 동창생이자 노장적 풍모를 지녔던 화가 장욱진, 순진무구한 사랑을 노래하며 궁핍 속에 요절했던 화가 이중섭 등의 낭만적 풍모들과 여실하 게 차이를 드러내 준다. 그래서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는 흔히 우리의 근대 화가들에게 따라 붙게 마련인 낭만적이고도 문학적인 내러티브나 신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다만 우리는 격랑의 시대 속에 자유인을 몸으로 실천해내고자 한 모더니스트의 초상을 만나게 된다. . 그 20세기를 관통하여 살며 온 생애를 우리 화단에서 추상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일구어내는 데에 썼던 유영국에게‘추상미술의 거장’,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추상’이라는 말만으로도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던 시대는 갔다. 우리에게 이미 추상미술은 너무나도 낯익은 것이 된 마당에 그러한 평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막연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편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배반하는 삶의 조건들에 저항하며 삶을 곧추 세우기 위한 자유의식이, 다른 한편에는 그 삶의 지지기반인 우리의 대지와 자연에 대한 적극적 비전의 기획들이 가로지르고 있는 그의 삶과 예술세계가 격동의 세기의 시대정신의 실천이었다는 사실이다. 일관되게 구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그의 삶과 예술은, 그래서 젊은 시절의 처녀 작 <랩소디>의 유토피즘을 늘 그 시원의 기억으로 간직하며 전개되는 듯하다. 유영국의 추 상예술이 지난 20세기 이 나라 공동체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정신으로서 자유정신과 이 땅 의 대지와 자연을 향한‘랩소디’로 다가서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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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예술 작품은 그 생산자인 작가의 창의적 열정과 실천의 산물이다. 유영국 화백의 작품 세계도 그 예외 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전적으로 수용자의 몫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자나 비평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나 컬렉터 등 전문가들의 시각과 활동은 세간에서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 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번 호에는 경향신문 기자로서 1964년에 열린 유영국 화백의 제1회 개인전의 리뷰를 실명으로 기고했으며 이후 미 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의 길을 걸어 온 이구열 선생, 그리고 큐레이터로서 1996년에 개최된 호암미술관 초대전을 담당했던 박천남 선생(현재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의 체험 기억을 구술 채록하여 싣는다.  유영국 화백은 1948년 <신사실파전> 개최 이래 한국 미술계에 그룹미술운동의 시대를 최초로 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1964년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부터는 주로 개인전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생전에 두 번 에 걸친 회고적 성격의 대규모 미술관급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그 중 하나는 1979년의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이 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17년 후에 열린 호암미술관 초대전이었다. 큐레이터쉽은 물론 뮤지엄제도조차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던 시절의 일들이지만, 이 두 구술채록이 유화백의 작품세계 연구에 적지 않게 기여하리라 기대된다.  132 제8집 | 2012 기억 속의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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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큐레이터와 비평가의 기억 박천남/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이구열/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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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제8집 | 2012 《유영국 전》(호암미술관, 1996. 10. 16-11. 24) 이 오늘 박천남 선생께《유영국 회고전》(호암미술관, 1996. 10. 16-11. 24)을 담당했던 큐레이터로서 전시 개 최 관련 경험과 기억을 여쭙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에 앞서 몇 가지 질문에서 시작하지요. 박 선생께 선 몇 년에 호암미술관에 들어가셨지요?  박 92년도에요. 3월2일 날 인턴쉽을 시작해서 8월31일 날 육 개월 끝나고요. 12월19일 날, 그룹 입사로 들 어갔습니다. 이준 선생이 저보다 한 달인가 먼저 왔을 거예요.  이 그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나요? 박 저는 그때 인턴이었고 그분은 경력도 있고… 근현대를 담당할 사람을 찾으면서 금호를 떠나오게 됐고,  아르 바이트하던 박영택 선생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게 되었죠. 박영택 선생이 떠나고 신정아 씨가 그 자리에 들게 되었고. (웃음) 처음 92년도 갔을 때는 중앙일보사 호암갤러리하고 삼성문화재단이 막 합쳐졌을 때였 어요. 제가 기억하기론 김용대, 한정욱 선생 두 분이 통합에 반대했죠. 명함도 그냥 갤러리 소속보다는 중앙 일보 문화사업부 호암갤러리가 그럴 듯해 보였으니까. 그때 가자마자《김정숙 선생님 1주기 회고전》을 맡았 어요. 김광진이라고 제 동기는 용인에서 시작했고. 이 두 분이 같이 시작했지요.  박 저는 서울에서. 호암갤러리 2층에서. 이종선 부관장이 고미술 전공자로서 호암갤러리까지 관리해 한정욱 선 생이 힘들어 하여 그만두게 되었죠. 본부가 용인이 된 거죠. 이준 선생이 있었고, 그 학예실엔 고고학, 고미 술, 현대미술이 같이 있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상적인 스타일이에요. 고고학 쪽은 맨날 없어요, 발굴 나가니까.  이 벌써 미술관 일 21년째가 되니 기억할 게 많아졌네요. 박천남(朴天男, 1961- )의 기억 대담자 박천남(이하‘박’,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이인범(이하‘이’, 상명대학교 교수) 김주원(이하‘김’, 미술비평가) 일시 2012년 11월 14일, 오후 12:00-2:00 장소 일식당(종로구 구기동 소재) 일러두기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는 중 해독되지 않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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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이 김정숙 선생 전시 다음에 또 어떤 전시했어요? 박 ***** … 친일이던 극일이던 어쨌거나 그래도 한 시대를 이렇게 좀 이런 저런 연결 다리 역할도 해 주고, 제자 를 길러낸 분인데 너무 그 미망인 그때 ** 했었을 거예요, 아마. 생활이라던가 또 거기에 대한 후배 제자들에 어떤 뭐랄까 관심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더라구요. 이 아, 그래요? 박 그래서 슬프게 전시를 제가 뛰어 다녔던… 그리고 이태리《트랜스아방가르드 현대미술》. 그리고 김용대 선생이 했던 그《한국의 현대미술》. 선묘 와 표 현주의… 오광수 선생님이 커미셔너 했던 거 하고.  이《고려국보전》, 《고려불화전》은 언제에요? 박《고려국보전》이94년도인가, 3년도였을 거예요. 《고려불화전》그 다음에《분청사기전》, 92년도에 중국《명 청회화전》. 그때가 수교가 됐어요. 92년도에, 8월 달인가? 수교되기 전이었어요, 그 전시가. 수교 기념으로 했나? 그때 고궁박물원 큐레이터들이 와서 자기도 처음 보는 거라고… 그림 펼치면서 나도 처음 보는 거고, 앞으로 다시 아마 볼일이 없을 것 같다고… 이 호암미술관이 큰 미술관이야, 그러고 보면. 국박, 국립현대미술관 모두 포함해서 생각해봐도. 박 전시를 어디를 통해서 했던가? 뭐 책상, 사무기구 만드는 회사 **, 독일에서 쇼 케이스를 직접 공수해 맞춤 제작인가 뭐 조립인가를 했어요. 항온항습 조건을 갖춘 쇼 케이스가 국박에 없었어요. 전시를 하고 재단에서 그거를 다 국박에 준 거로 제가 알고 있어요, 보관을 안 하고. 그러니까 전시조명이든, 디스플레이라든가 등 등에 대한 전시공학적인, 그런 전시문화 같은 것들이 국박에 전해졌다고 봐요. 제가 이응노(李應魯, 1904- 1989)를 가지고 광주시에 내려갔을 때에도 거기엔 전시를 만든다는 개념도 없었고. 이 그게 몇 년도였어요? 박 이응노 5주기였으니까, 94년이었나 5년이었나 그랬을 겁니다. 박인경 여사님은 처음 호암에서 전시할 때 입국이 안 되는 당시에 저희가 처음으로 했어요.  이 그때 1월이었죠… 박 그분이 돌아간 게 겨울이었고. 돌아가시고 나서 곧 했으니까. 돌아가실 때 한 전시는 한정욱 선생이 호 암갤 러리 있을 때, 89년인가 8년에 했던 거구요. 저는 5주기로… 말년에… 박인경 여사님이 국내 입국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분을 모시고 제가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요. 조용필 디너쇼. 뭐 또 양수리 *** 하여튼 메기 탕 같은 거, 드시게 하고… 이《유영국전》개최하기까지 담당한 전시가 더 있었어요? 박 거기는 기획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기획은 어쨌거나 인제 관장님의 어떤 오더(order)라던가 만들어 진 거에 서 하는 거고, 주제 기획전 같은 경우도 가나가 기획했었어요. ** ****** 나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적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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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제8집 | 2012 같은 것도 내부에서 기획한 게 아니고, 가나가 뭐 다니엘 ****라든가 ** ***라든가 보니토 올리바라든가 등등 평론가하고 화랑 사이에서 삼성 쪽에 연결을 시켜 주고. 그 당시에 이호재 선생이 노력을 많이 했고, 저희 내 부적인 당면 과제가 자립갱생의 의지도 우리가 좀 가지고 (웃음) 해 보자.  이 내가 호암에 드나 든 게 95년도 1월 달부터 4월 달인가? 서울, 현대미술관 짓는다고 그럴 때. 박 예. 그래서 92년 말부터 근현대가 커지니까. 그러니까 학예실도 커진 거죠. 그래서‘고미술하고 고고학은 용 인에 현대미술은 92년 말93년 초부터 이사했는데, 중앙일보 맞은편에 순화빌딩을 전 층을 빌려서 올라가 요 . 3층. 거기서 전시를 만들어서 호암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기 시작해요. 호암미술관에 있는. 조직이 없고 전시장 개념이에요. 거기 있다가 중앙일보 19층에 공간이 확보되면서 중앙일보 회장실 바로 아래층으로 들 어가게 되고, 그때 뭐 건물 외벽에다가 이렇게 네모나게 큰 프레임 박아서 현수막 걸고 했던 것들이 지금 이 제 호암 아트홀에서 쓰고 있는, JTBC에서 쓰고 있는 호암아트홀에서 쓰고 있더라고요. 이 96년도 가을이었나요?《유영국전》은? 박 네, 가을이었고, 제 기억에는 이일(李逸, 1932-1997) 선생님 마지막 원고였어요, 그게.  이 아, 그랬구나.  박 청탁을 드렸는데. 그분 살아생전 마지막 글이 수록된 도록이 이 도록이고요.  이 아, 그래요? 박 제가 그분한테 인제 청탁을 드리면서. 그분의 본명을 알게 됐고, 신분증을 받으니까요. 그리고 인제 평 양에 서 넘어 오셔 가지고 본적지가 삼청동으로 바뀐 것도 알게 됐고, 그랬어요.  김 이일 선생님이요? 박 네. 이 도록을 제가 그분한테 전달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이분은 뭐 제가 좋아하기도 했었고 많이 싸 우기 도 한, 학과장 입장에서 선생님 중에… 댁도 많이 출입했었고.  이 호암미술관에서《유영국전》을 개최하게된 전후사정 좀 말해 주실 수 있으세요? 박 관장님이 워낙 좋아하시는 작가 분이시고, 또 삼성 가계에서도 아주 존경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까?신세계 에서든 뭐. 현대(갤러리)가 대박 터지는 그런 분위기였었죠. 현대가 많이 작품 수급을 했으니까… 전성기였고… 김 아, 갤러리현대. 박 거의 뭐 선생님 전시를 많이 했죠, 갤러리현대. 그래서 사모님께서 각별히 좋아하셨고, 제 기억에는 사 모님 이 이 전시를 보고 되게 좋아하신 게, 이 도록의 어떤 디자인, 표지 디자인하고, 이게 따뜻했잖아요. 그 러고 아마 제 기억에는 무슨 아트 상품도 만들었어요.  김 맞아요, 손수건하고 수첩.  박 네, 네. 그런 걸 좋아하셨어요. 전시가 내용도 내용이지만, 뭔가 이렇게 볼거리, 만질 거리가 좀 많이 있 었잖 아요? 근데 제 기억에는 이 전시인가에 누가 이석인가 하는 분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인사를 드렸는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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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모님이 오라 그래서 왔다고. “홍라희 관장님이 이런 분들하고도 교분이 있으시구나”그때 명함 받은 기 억이 나는데. 뭐 대한제국 뭐 무슨, 무슨 몇 대손. “선생님, 저 옛날에 저 비둘기 좀 많이 불렀습니다.” 1) 그랬더니 뭐“아, 그러시냐”고… 전시 오픈 때, 그때 호암갤러리 들어가면 우측에 아트샵이었어요. 조그맣게 그래서 거기서 아트 포스턴가, 아트 미러(mirror) 그러니까 그게 디자인 팀이 꾸려지면서 그 디자인 팀도 뭘 해야 되 잖아요. 그러니까 뭐 포스터나 뭐 거울, 앞면은 거울이고 뒷면은 뭐 작품 같은 거 집어넣고, 전화카드…《이 응노전》때도 전화카드 만들었으니까… 삼천 원짜리… 등등 보시고 되게 좋아하셨고. 네, 그 기억이 나요. 관장님이 되게 좋아하셨어요.  이 근데 유영국 선생님 팔순이죠, 이 해가? 김 96년이? 이 팔순이 되는 해야. 그런데 팔순 기념전이라는 얘기는 안 한 것 같아요.  박 팔순이라는… 지금 기억으로는 그 인지를 전혀 못했었구요. 그걸 앞에다 내세우지는 않았으니까. 월전 장우 성(張遇聖, 1912-2005) 할 때는 팔순을 내세웠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제 기억에 팔순이 그렇 게 익숙지가 않아요. 유영국 선생님의 전시. 이 어, 그렇게. 유영국 선생님도 싫어하시지 않았을까 싶어.  김 안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박 그때는 제 기억에는 그니까 KBS도 선생님을 인터뷰하기 어려운 그런 좀 분위기였습니다. 안 하시니까. 그 래서 인터뷰 자료 같은 게 별로 없으셨기 때문에 제 전시를 할 때. 그 당시에 무슨 프로가 하나 있었거든요. TV미술관인가? 문화산책인가? 거기서 PD들하고 **들이 이렇게… 제가 이제 인터뷰를 자주 다니니까 설득 을 시켜달라고… 그래서 사모님께 말씀을 여쭙고, 사모님하고 저하고 양공 작전을 펴 가지고 선생님하고 움 직여서, 그 당시 제가 알기로는 드물게 최초로 아마 인터뷰를 땄을 거예요, KBS가. 그래서 인터뷰이와 인터 뷰어의 관계가 이렇게 성립이 안 되고 그니까 저는 약간 반측면의 뒷모습만 들어가고. KBS가 이렇게 진행 하는 모양으로 해 가지고 나갔던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마… 김 선생님이 인터뷰는 진행하셨는데… 박 예, 제가 질문을 던졌죠. 선생님이 하여튼 인터뷰를 그때 무슨 이유를 말씀 하셨는데, 사모님께서… 기 억을 못하겠어요. 이 하여튼 뭐, 누구한테 자기를 설명하는 일은 안 하시는 분이었으니까. 박 그래서 드물게 이제 댁에 들어가서 이… 왼쪽 방이었으니까. 거기서 인터뷰를 했어요. 저쪽 직진해서 약간 비켜서 한 시 방향에 작업실이셨고, 들어가서 오른쪽에 아마 식탁이 있었고.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왼쪽 방이 었어요. 거기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랬더니] 말씀을 잘 하셨어요. KBS도 거의 쾌재를 부르고… 하나 땄다 이거죠. 그러고 왔던 기억이 나요.  1) 편집자 주:이석이 가수로 활동 하면서 부른 노래제목이<비둘기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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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제8집 | 2012 《유영국전》을 담당하기까지 이 박천남 선생께서《유영국전》을 담당하게 된 특별한 사정이 있었어요? 박《이응노전》같은 경우는 그때 저도 93년도인가 이제 서울로 학예실이 올라오면서 의욕적으로 아마 삼성문 화재단 최초로 ****겠죠. 그리고《정창섭전》을 했어요. 92년도에… 선배 큐레이터들 간의 갈등으로 당시 한 용외(韓龍外,1947- ) 상무가 절 붙잡으면서“안 되겠다. 네가 해라.”해서 (웃음) 홍라희 관장님의 전폭적인… 감각은…‘사람은 거칠어도, 감각은 뭐 있구나.’라고 어필하게 된 계기가 됐는 데. 사실은 제가 거기서 나름 좀 일조를 했죠. 그래서 저를 믿으셨는지“네가 맡아라”그래서, “어, 이 큰 걸 제가 합니까 ?”그랬더니. “할 수 있다.”고…“문만 열어줘라, 다 담겨 있다. 문만 열어라, 정해진 날에…”“문 열겠습니다.”그리고는 문을 열어… 이 준비 시간이 별로 없었군요? 박 없었죠. 그니까 정헌이 선생은“왜 내 전시가 뺏어갔냐?”“무슨 말씀이세요?지금 이게… 저도 괴롭습니다…” “내 전시 뺏어갔어 !”막 그래.  김 지금《이응노전》얘기 하는 거죠? 박 예. 박인경 여사님한테 사실은 제대로 만들어 드리려고 열심히 했어요. 나중에 오광수 관장님을 홍라희 관장 님께서 가운데에다가 모셔 가지고, 제가 아무래도 경력이 짧고, 또 큰 전시고. 또 여러 가지 의미가 있 는 전 시였기 때문에 오광수 관장님은 뭐 꼼꼼하게 들어가는 분위기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전시를 잘 마무 리 했 죠 . 그런 식으로, 큐레이터가 뭘 하겠다고 만든 게 아니고, 관장님이 뭐 이렇게 잘 이렇게 좀… 자기가 모르 는 범위도 있을 수 있으니까는요. 근데 학예실에서 기획하는 것처럼 하고. 실제로 인제 진행을 인제 큐 레이 팅을 하는 그런 거는 없었고. 《유영국전》도 학예실 쪽에서 올라간 게 아니라, 관장님께서 오더를 주셔 가지 고 , 담당으로 제가 인제 하게 된 거죠. 전시 준비 과정 김 그건 얼마나 준비 한 거예요? 박 오래 준비한 전시는 아니었구요. 그렇다고 번개치듯 한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워낙 연세도 있으시고,  어려 우신 분이고. 또 소문에 많이 좀 까다로우시고, 좀 제가… 이 나한테도 몇 번 그때 고백한 적이 있었어요. 박천남 선생이.  박 정말. 정말… 정말 했죠. 진짜 그리고 집안 어르신 모시듯이… 이렇게… 전시는 뭐 벼락 같이 하지 않았 고 . 뭐1년, 2년을 하진 않았지만 준비는 꼼꼼히 했어요.  이 그 때, 자료 조사 연구 관련해서 시간을 어떤 데에다 주로 썼어요? 벌써 20년이 되어가네요. 박 자료가 많지 않았던 거 같애요. 생각보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썼던 거 생각나고, 대학교 ***한 친구가 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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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넷이 그때는 도입이 된 이 후이긴 했지만… 이 검색 같은 건 안 됐지.  박 그래서 일단 저희는 옛날에도 그랬지만은 전시가 커지면 무조건 창고에다 모두 털어가지고 석·박사 논 문… 다 복사, 제본. 그리고 그 다음에 단행본 다 털어 내는 것. 그 다음에 미술잡지『계간미술』, 『월간미술』 , 『미 술세계』이 목차. 다 복사하고 뒤져 가지고, 『공간』… 유영국관 관련된 것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작업 을 먼저 했죠. 그래서 그걸 가지고, 선생님 실물이 제일 중요하고, 또 작업 중에 공개 안 된 것도 있었고 , 진 행 중이신 것도 있었고 하기 때문에, 뭐 그렇게 연동하면서… 고민했던 거 같애요.  이 혼자 하신 거네요. 혼자 팀장이 돼서. 박 예, 그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때는 사람이 있어도… 회사 책임제 같은 개념이었죠.  이 그러니까 96년《유영국전》은 온전하게 박천남 선생이 책임을 져야 되는… (웃음)  박 도록 앞에 어떻게 되어 있나요? 크레딧 페이지(credit page)에? 이 진행 박천남, 호암미술관 주임학예연구원. 도록 제작을 가나아트센터에서 했네.  박 예. 그 ****하고 저하고 동갑이기도 하면서 꼼꼼한 사람이라. 가나는 미웠지만 일은 같이 했어요.  이 본문 영역(英譯)은 김문수… 김문수 씨는 뭐하는… 저기에서 시켰겠다. 박 제 기억에는 그분이 아마 미국… [유엔 빌리진]가 한남동? 거기 일을 하시는 분인데, 일을 그 당시 잘 해서 저 희가 많이 맡겼던 분이에요. 민순기 씨가 소개했을 겁니다. 네 그래서 그렇게 했고, 그때 제 기억에는 작가론 을 못 쓰게 했어요. 그니까 큐레이터 서문을 쓰는 게 되게 좀 약간 이렇게 억압돼 있었었던… 이 당시엔 그랬지요. 박 검증이 안 된 것 일수도 있겠지만, 외부 필자한테 주거나 아니면 작품에 대한 해제를 달았잖아요, 나름대 로 . 그것도 정말 뭐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당시로서는 완전 이례적인.  이 그렇지. 내가 92년도에 국립현대미술관《젊은 모색전》을 기획하고도 글을 못 썼다고… 박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리고… 이 큐레이터 제도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으니까.  박 글을 써도 외부 필자들 글을 받는 어떤 그런 좀… 분위기였었고, 그 당시에 또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여튼 담 당자가 글을 쓰지 않는, 또는 못하는, 용인이 안 되는, 희안하게도… 그때 최 선생이 아마 천경자(千 鏡子, 1924- )인가, 이성자(李聖子, 1918-2009)를 썼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외람되게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설 명을… 왜냐하면 작품이 좀 일반인이 보기엔 좀 난해할 수도 있고, 또 좀 이렇게 비슷한 좀 모티프도 좀 많이 있고. 그래 가지고, 설명을 좀 쓰고 싶었어요. 그러고 연보는 그렇게 만들고 싶었고요.  이 연보가 이때 그래도 상당히 꼼꼼하게 만들어졌어요.  박 제가 그 전에 만들었던 고암 이응노는 김민정 씨가 만들었구요. 정창섭 연보를 제가 만들었어요. 그때 참 고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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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제8집 | 2012 수 있는 게『계간미술』에 나온 거하구 현대화랑에 발간한『현대미술』, 『화랑』지 말고, 『현대미술』지. 『 계간』 지. 그거를, 거기에 그건 아마 김달진 선생이 했을 거예요. 그 정도를 가지고 찾아서 만들었죠. 가급적이 면 사 진을 좀 사모님이 주시면“이렇게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아마《정창섭전》을 예를 들면서 말씀 드린 것 같 아요. 이 그러니까 박천남 선생이 21년 됐어요? 큐레이터 생활… 박 92년이니까, 지금… 21년 전이겠죠.  작품 리프로덕션과 수복 이 그 당시에 뭐 작품선정이라던가 전시 조직에 어떤 키워드 같은 거를 갖고 한 건 아니지요?뭐 일단 회고전 형식인 거… 박 있었어요. 근데 지금 기억이 안 나네요.  이 근데 그때… 이 작품들. (카탈로그의작품 R3 (1938)/ 작품 R4 (L24-39.5)(1939)를 가르키며) 박 예, 그거는 재현을 하자고… 그게 꼭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거를 그때 재현을 했죠.  이 리프로덕션을 만들었어요? 이때도 만들었어요? 박 만들었죠. 제 기억에 저거를 어디서 만들었더라? 만들었어요, 저거를. 김 근데 누가 재현을 해야 된다고… 박 그때 아마 제가 얘기 했던 거 같은데요? 김 선생님께서? 아… 박 예, 그게 사진에 있고, 뭐 그래서 이거를 재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에서 그 작업실을 재현했 거든요. 그 공간을, 삼청동 작업실을. 너른 공간을. 이 이때 이게 이 작업들이 여기에 이제 도판에 실린 거 말고 전시 됐던 것들이 있어요? 박 사진이요? 이 응. 도판에 실린 것 말고, 작품전에 출품이 된 게 있었어요? 박 제 기억엔 없었던 거 같은데요. 그대로… 왜냐면 그게 되게 조심스러웠었고, 이걸 꼭 해야, 전시 의미가 있다 라고 생각했던 거 같구요. 근데 이제 이 **** 작업실을 재현을 못할 어떤 그런 거였던 것 같아요. 이 이 작품들은 재현이 언제 되었냐면 79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일단 된 거였는데, 몇 점은… 선생님이 특별히 의도를 말씀하시거나 고집을 피우시거나 그런 것들이 있어요 ? 작품 선정하는데? 박 아, 그런데 기억이… 이게 정확해야 되잖아요? 이 뭐 기억력이라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우선은… 전체적으로 들어간 시대 분포가 고르긴 해요. 시 대마 다 대표작이 될 만한 것들을 끄집어 낸 것은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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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박 아, 그리고 그거를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작품의 상태가 안 좋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용인에 보존 과학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손을 봤어요. 그리고… 이 그땐 누가했어요? 박 손을 다 봐 드리겠다는 전제가 있었어요. 복원이 안 되더라도. 그때는 김주삼 선생이 담당했어요.  이 김주삼? 박 김주삼, 지금은 저… 이 그때도 김주삼이, 김주삼 씨가 그때도 있었어요? 박 초창기, 예, 그 **** *** 뭐 등등등등 얘기하고 뭐 그랬던 거 같아요.  이 아, 김주삼 선생이 96년도에도 있었나? 몇 점이나 했어요, 그때는? 박 많이 못했어요. 시간이 워낙 걸리는 일이니까. 전시에 내놓기 위해서 몇 개를 한 거 같습니다. 제 기억 은 지 금 그렇습니다. 그러고. 이 아, 김주삼 씨가 그 때. 박 그런 것도 다른 데 맡겼으면 선생님 작품이 워낙 색이 중요하고 뭐 잘못 될 수도 있으니까… 제대로 공 부하 신 분입니다. 전공도 [화공]학을 했고. 이 그거야 뭐 누구보다도 민감했던 분이니까.  박 그래서 그거를 말씀을 드리고,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나요.  이 그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보존과학실이 만들어지면서 몇 점을 했는데. 말도 안하고 뒤에다가 배접을 하고 원상을 훼손시켜서 굉장히 불쾌해 하셨다고… 뒤에 김주삼 선생이 왔을 땐 좀 달라졌겠지.  박 그럴 거예요. 제가 97년도에 로댕갤러리 건립 오픈 일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학예실에 있으면서 남자가 귀하니까, 로댕갤러리 개관 준비도 했죠. 개관 전에 전시를 두 개 했으니까. 《백남준 요셉 보이스의 우연한 만남전》을 했고요. 《로댕》전시를 했구요. 그때도 김주삼 씨가 했었거든요. 제가 그 전에 인제‘선생님이 한 번 봤으면…’혹시 이쪽으로 가도 되는지에 대해… 그래서 색 맞춤까지의 어떤 저기, 합의가 있어야 되잖아 요 . 틀려도 안 되고, 하여튼 그런 고민들이 있었던 거 같아요. 작품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보존과학적인 어떤 개입이 있었던… 전시로 기억이 됩니다. 이때 미션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펼쳐 놓고 마음에 드 시는 거 이렇게, 뭐 이렇게 하시는 거겠죠. 그래서 제 기억에는 이렇게 아주 추상화 되어 가지고, 기하학적인 그런 그 산이나 그림 말고 페인팅, 가로 형으로 긴 거, 정방형 말고, 대형 대작들을 많이 끄집어내고… 소개 가 되는 게 저 개인적인 어떤 욕심이었던 겁니다.  이 전시할 때, 이미 (호암미술관에) 컬렉션은 많았잖아요? 유영국 선생님 컬렉션이. 박 예, 있었죠.  이 몇 점 정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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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제8집 | 2012 박 기억은 잘 안 납니다. 이 기억 못해요? 박 네.  이 박천남 선생께서 이때 전시하고 큐레이터로서 성공과 실패에 관한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세요? 박 워낙 대가시라 너무 어렵게 긴장하면서 했고.  이 아, 그랬어요? 박 제일 기억에 남는 거는 물론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그 사모님 있죠? 사모님… 사모님이 정말 따스하게 대 해 주시고. 유영국 선생님하고 제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많이 해 주셨어요. 그니까“저 양반이 **이기도 한 다.”하고 상담해 주시기도 하고. 선생님이 좀 불편하시면 저한테 설명해 주시고. 사모님이 조율을 다 해 주 셨고. 사모님하고 저하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김 아, 유영국 선생님 사모님이요? 박 예, 저하고 이제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 *** **가고, 작전을 짜가지고… 사모님이 그 역할을 많이 하셨어요.  이 그래, 그 사모님이 세상하고 유영국이라고 하는 작가 사이의 매개 포인트지 뭐. 그러지 않고는 유영국 선생 님이 참 접근하기가 쉽지 않으셨으니까.  박 그거를 참 잘 해 주셨어요. 그 아마 저를 좀 불쌍히 여기셨거나 (모두 웃음) 잘 보셔서… 그나마 좀 경 험이 적으니까… 그런 생각에… 이 근데 저 박천남 선생님이 전화로도 그렇고 만나서도 그렇고 나한테 몇 번, 나한테도 뭘 물었어. 이런 저 런… 김 아, 유영국 선생님의… 이 어. 유영국 선생님 절대 그냥, 안 되는 분… 그런데 그때, 그때 그 기억이 난다. 앞에 그 전면에 사진 붙인 거, 그거 가지고 하지마라 말씀 하고, 저 호암 미술관 2층에 올라가면 거기에… 박 그니까 그런 데가 많지 않았잖아요. 화랑에서 많이 하셨고. 그림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앞 전시에서 다 많이 배우는 거 같아요. 좀 입체적으로 꾸미고 *** 많이 나와야 된다. 그래야 화랑 전시가 안 된다. 그러다 보니까 상태가 안 좋아도 손을 못 쓸 정… 이렇게 나가자… 라고 하는 생각을 했던 거 같고. 대작을 많이 좀 보실려 고 했던 거 같고 뭐 그런 거 같아요. 당시에. 이 그 당시에 호암미술관에 전시 패턴이 어쨌든 저 서비스 룸이 있었다고… 아까 얘기했던… 인터뷰하는 거라 던가, 영상물을 만들었는데… 그 영상물은 결국 그때 못 만들었죠? 그런 거 만들어 놨으면 다 역사적인 자료 가 되는데… 김 아《유영국전》은 없었어요? 박 예. 《유영국전》은 없어요. 《이응노전》은 한 보통18분 정도로 만들었어요. 《이응노》, 《프랑스 설치 작가 8인 전》은 만들었는데, 원래 그 자리가 저희 근무하던 자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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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김 왜 못 하신 거예요? 안 하시겠다고 한 거예요? 박 안 하시겠다고 그러죠. 그거 할려고 엄청 노력을 했는데. 사모님하고 뭐 도움 받고 막 이렇게 했는데. 이 그것까지는 못 갔어도 그래도 앞에 입구에 선생님… 박 모자 쓰시고. 이렇게 쓰신 사진, 기억나요. 이 대형 사진은 걸었지… 하여튼 독특한… 한국 미술계에서는 다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를 가지 고 계 셨던 분인 거는 분명해. 《유영국전》기획에 대한 평가 이 미술관에서《유영국전》하고 난 다음에 평가는 어땠었어요? 박 좋았습니다. 일단 관장님이 정말 만족하셨어요. 전시가 잘 떨어졌습니다. 저희가 봐도. 선생님 작품이 워낙 컬러풀하고 또… 좋았습니다.  이 큐레이터들 사이에서도? 박 네. 관장님이 좋아하시면 끝이죠, 뭐. 이 아, 그런 거예요? 박 네. 큐레이터들 사이에서 말은 표면적으로는 없었습니다. 뒤에선 어떨지는 몰라도. 이 언론 쪽에서 가지고 있었던 입장들은 어땠던 것 같아요? 박 언론 다 반응 좋았죠. 근데 중앙일보사가 가까이 있었고, 《유영국전》은 워낙 뭐 손 꼽히는 이런 한국 미술 거물 중에 한 분이셨잖아요. 반응은 다 좋았었습니다. 부정적인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전 시를 입체적으로 꾸미려고 노력을 많이 했구요. 우선은 까다로운 전시를 잘 풀었다, 그게 가장 중평이었어요 . 선 생님이 일단 어려우신 분이고. 예 그게 가장 컸죠. 또 이거, 이거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했 느냐. 뭐 그런 거. 특히 사진. 제가 전화 한 번 드렸었잖아요. 도록 만들고 계실 때 예, “어떻게 **** 하시냐”제가 여 쭤보고 그랬잖아요. 도록도 **** 중에 하나였대요. 선생님이 뭐 대놓고 말씀 하셨으니까, 본인이 만족한 책이 없다. 색이 중요한데 절대 그 색이 안 나온다. 그래서 계속 보여드렸어요. “이 색 어떠십니까?”, 이 색은 어떻 습니까 ?” 이 감수를… 박 네, 직접 하셨어요. 본인 컨펌 받고 도록이 이렇게 나온 겁니다.  이 그때 다른 전시에 비해서 짧은 기간 준비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기억하는 바로도요. 관람객 수 는 그 렇게 많진 않았죠? 박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때도 삼성 코링이라든가 계열사 직원들을 많이 보게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 직 원들도 많이 와서 봤어요. 그리고 재단 내에 TV가 있었습니다. 그 방송국이. 삼성 내에 에스비씨(SBC)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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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제8집 | 2012 방송국이 있었고, 사실은 어떻게 보면 중앙방송 JTBC를 아마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는 거였는지도 몰라요. 시스템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허락만 받으면 바로 방송할 수 있는, 그리고 각 사업소 별로 그 지방 방송이 있 는 거죠. 그때도 전파**국 가면 영상 기록이 있을 겁니다. SBC에. 그렇게 해서 계열사에 소개가 되고, 삼성 코링이나 이런 직원들이 *** 번 돈 가지고 하는 거니까, 그분들을 일단 보여 줘라, 그런 것도 있었구요.  화가 유영국의 대응 이 박 선생께서 사모님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어려움을 풀어 주신… 박 은인 같은 분이죠. 저 본인께서도 당신 그 남편을 고집을 좀 풀어서 전시를 좀 잘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 있으 셨던 것 같구요. 지금도 그분 아마 안경 쓰셨을 거예요. 그분 이제 모습이 선해요. 너무 감사해서 정말 내가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누굴 의지하겠어요. 미술관도 선배들도 그렇지만은.  이 선배들이 할 일이 있고 또… 박 네, 선배들이 후배에 대해서 이렇게 약간 좀 자애적인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었고… 이 어. (웃음) 박 뭔가 좀 실수를 하면 뭔가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잘해도 칭찬도 안하고 왜 좀 무슨경쟁자도 아니고 좀 이상 한 거 있지 않습니까? 묘한 좀 그런 약간 경직된 분위기에다가 그걸 혼자 풀어야 되는데, 제가 그걸 뭐 넘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전시를 많이 봐온 것도 아니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는데 자료는 없고, 뭐 절대 절명의 위기죠. 풀어야 되고… 이거 정말 나한테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열심 히 했 는데. 사모님께서, 집안의 분위기나, 유영국 선생님도 참 따뜻한 분이세요. 제가 밖에서 듣고, 뵌 그런 분은 아니셨었고. 정말 잘 대해주셨고, 집안이 다 따뜻했어요. 그래서 저는… 네, 그런 처음에 가졌던 막연한 어떤 좀 두려움 같은 건 좀 덜해졌죠. 그래서 그 집을 자주 왔다 갔다 했어요. 그 집 앞에 도로가 좀 나름대로 이렇 게 큰 골목은 골목인데. 큰 길이었는데. 주차하는 기억도 나고, 네 그렇게 좀 자주 다녔던 것 같아요.  이 유영국 선생의 퍼스널리티나 작가적 태도나 이런 거에 대해서… 박 작가 입장에서, 저는 뭐 기획자라기보다 그냥 진행자 개념으로 봐야 되겠지만, 저를 많이 헤아려 주신 거 같 애요. 그리고 연세가 많다고, 높다고 또 어른이시라고 이렇게 해라 하는 식이 아니고. 그냥 뭐랄까 좀… 네, 그런 입장이 아니셨어요. 고집은 있으셨어도. 그게 자기 고집이죠. 당신의… 있으셨어도 모르겠어요.  제… 가 같이 이렇게 뵙고, 얘기 하고 그럴 때 되게 오피셜하게… 저를 이렇게 어떤 파트너처럼 전문성을 인 정하 시고 저를 대해 주셨어요. 그 역시 그분도 이렇게 예를 갖추셔서 그리고 나중에는 아드님이 법학 하는 분인 가 그러셨는데. 제 기억에는 그 각 그랜져. 그랜져를 타고 오셨는데. 저를 데리고 사모님하고 그 선생님 하고 저하고 아드님하고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팔레스호텔인가? 고생한다고, 수고한다고. 그랬던 기억이 있구 요 . 이렇게 하여튼 되게 잘 해 주셨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마 호암 전시에 또 다른 어떤 본인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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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인적인 애정을 가지셨는지는 몰라도, 또 하나의 매듭으로 보셨는지는 몰라도, 되게 애정을 가지고 잘 해 주 셨어요. 그런데 그건 아마 제가 그 이렇게 좀 성실하고 이렇게 좀 선생님 입장에서 많이 좀 이렇게 움직 여 주 니까, 제 입장에서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그러하시면 그냥 그렇게 해서 이렇게 뭐 이런 식으로 하다 보 니까 아마 선생님도 좀 믿음을 가지신 것 같고. 그랬던 것 같아요. 워낙 미술계는 이렇게 작가 입장에서 작가 의 어 떤 그 사생활이나 뭐 그런 걸 존중하면서 하는 것 보다는 개중에 그러지 않은 분들이 많았었잖아요? 화랑은 작품 빨리 떼 내야 되고, 어떻게 해서 요건 또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런 개념이 아니고 뮤지엄 개념이었고. 어떤 상업적인 목적이 없었고, 목적이 있었다면 그냥 뭐‘잘 하는 것’그런 거였기 때문에… 네. 그런 거는 아마 이렇게 좀 나중에 인정을 하신 거 같아요. 그렇지만 다 컨펌을 받았어요. 전 이렇게 갑니다, 이렇게 합 니다. 노여워 하실까봐… 이 그 전시가 유영국 선생님한테 중요한 전시지 뭐. 79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이어서… 박 그리고 삼성 스타일이 있잖아요. 그니까 연출에 돈을 많이 썼거든요, 그 당시에도. 그것도 한 전시에 이 천만 원이 넘어 갔어요. 벽 새로 칠하고, 거의 저희끼리 집 하나짓는다 농담할 정도로 공간에 대한 어떤 깔끔 하게 이렇게 좀 정리해야 되는, 앞에 봤던 전시의 어떤 느낌을 다 털어 내고, 새롭게 보일 수 있는 단장을 많 이 했 거든요. 그렇게 그런 거를 확 싣다 보니까 아마 당신의 초상화도 크게 걸리고, 뭐 이것저것 뭐 상품도 만들 고 , 도록도 뭐 개중 본인이 만족할 만한, 그게 얼마나 만족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왔고. 이 그때도 휠체어 타고 관람하셨나요? 박 휠체어 타셨던 거 같은… 지팡이 짚고 걸으셨던 것 같으네요. 휠체어… 모르겠네요. 사진은 아마 있을 겁니 다, 재단에… 개막 사진. 이 내가 그때 일본 미토미술관(水戶美術館)에서…그지금육근병선생일민미술관 밖에 설치된 작품이 그때 미토 에서 전시한 거거든. 그때 오프닝에 세미나가 있어서 가서 발표를 하고, 김포공항에서 그쪽으로 직접 왔 을 거 예요. 김 아, 호암으로. 이 어, 어. 그 오프닝 날.  박 도록 표지도… 그 때『미술세계』초창기 아마 그 표지 디자인이 이렇게 책을 1, 2, 3, 4, 5, 6 이렇게 쭉 모으 면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처럼 이렇게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것처럼 할려고 했던 거예요. 이미지를 양쪽 풀(full)로 깔아 가지고 꽂아 놨을 때 예뻐 보인다. 그게 아까 말씀 드리잖아요, 그렇게… 이미지를 양쪽 풀로 깔았던 기억이 납니다. 싸인을 앞으로 이렇게… 키워서 꺼냈던 것… 이 박천남 선생이 한참 꿈이 많을 때… 지금 꿈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고. (웃음)  박 열심히 할게요.  이 지금은 몰라도 되는 걸 우리가 너무 많이 알게 돼 가지고. 다 역사인데. 큐레이터 제도가 제대로 소프트 랜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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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제8집 | 2012 을 못 한 거야, 우리나라에. 어디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한 번 있어야 되는데. 이 상태 가지고는… 아, 참 … 박 선생님이 인공심장인가 뭔가를 달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제 기억에는요. 인공심장인가? 그래서… 더 조 심하 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이 그러고 6년 있다가 돌아가신 거네요, 그로부터? 박 하여튼 말씀을 상당히 잘 하셨어요. 옛날 기억을 유학 가셨을 때 기억도, 대단히 또렷하게 말씀을 잘 하 셨어 요 . 즐겁게. 옛날 생각 하시면서 이렇게. 이 그거 녹음이 어디 있어요? 박 재단에 있을 거예요. 이 재단에 있어요? 박 분명히 녹음을 했을 것이고, 그때는 재단에 녹음기사하고, 영상기사가 따로 있었어요. 있을 겁니다. 그 래서 어쩌면 동영상 이엔지(ENG) 기록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도록에 게재된 사진 한 컷에 대하여 이 이거 말이에요, 이 사진. 이거 기억나시죠? 유영국 선생님의 자화상이 들어가 있는 거지만, 쇼윈도에 비친 거 같지? 쇼윈도가 아니라 콜라주를 한 거 같애. 사진, 사진 같지? 김 예, 뭔가 이렇게 조작을 하신 거 같애요. 작업을… 그냥 쇼윈도는 아니구.  이 이건, 작품인 거 같다. 김 네, 작품인 거 같애요. 사진 작업.  이 이거, 이거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이거에 대한 코멘트가 있으셨어요? 없으셨어요? 박 그니까, 단박에 떠오르는 건, 기자라는 표현이 생각이 나는데요, 기자.  이 기자? 박 예. 딱 보고 떠오르는 게 무슨 기자라는 말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기자? 박 네, 기자. 근데 제 기억에는 다… 그 소위 **말씀으로 제가 거기에 개인의 해석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건 진짜 팩트(fact)가 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거기 써져 있는 게 그대로 일 겁니다. 제가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이 유영국의 사진 작업 그 **것 맞아요? 박 맞아요. 사진에 관심이 많으셨었고.  이 어, 그래. 박 제가 거기다가 개인적으로 뭐 이렇게 써 놓을 그럴 데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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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이 쓰지 않았겠지. 박 그런 분위기였고, 제가 그때 또 연차였었고, 또 지금의 연차로 한다고 그러면 제가 거기다 제 개인적인 의 견을 써 놨겠죠. 캡션을 넣던지. 만약 그게 만약에 뭐 진짜 그분의 사진이던, 아니면 후대에 누가 이렇게 그거 를 이 렇게 했던 간에… 예, 제가 들은 바로는 그대로 일 겁니다, 그 당시에. 또 선생님이 뭐 이런 거짓말하실 이 유가 없죠. 이 그렇죠. 박 그리고, 기억도 분명하셨기 때문에. 이 아니, 그리고 뭐… 거짓말을 하거나, 뭐 수사를 하거나, 장식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박 네, 그렇죠. 그때 기억이 또렷하셨었어요.  이 아, 언제 조금 더 본격적인 자리 한 번 만듭시다. 이러면서 또 시간이 한 십 년 간다. 박 제가 이제 기억이 정확치가 않을 수가 있으니깐요. 오래된 일이고, 워낙 일이 한꺼번에 복잡하게 터지 던 시 절이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 기억하고 제가 정확이 말씀 드린 건지… 이 아니 뭐, 우리 기억이라는 게… 우리 역사라는 게 사실은 정확성만 가지고 해결 되는 게 아니니까.  박 그렇다면, 《유영국전》… 보통 전시 끝내고 인제 그 평가 보고서까지는 아니더라도 후대에 누가 보더라도 전시 계획… 그… 안서부터 마무리까지 다 볼 수있도록. 이 기획서.  박 파일을 만들어서 나오거든요. 그 파일이 삼성에 있을 겁니다.  이 아, 그래요? 그래, 그래. 박 그게 아마… 불충분하더라도 있을 거예요. 그때 하여튼 아래 아 한글인지 하여튼 보석글인지 뭐 훈민정 음으 로 써 가지고 만들어 놨을 겁니다.  이 오늘 저 바쁘신데 긴 시간 동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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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제8집 | 2012 첫 만남과《유영국 개인전》기사 범 선생님, 유영국 선생님하고 처음 뵌 것은 언제쯤… 열 전람회 할 때 취재 댕기면서, 만난 거죠 뭐. 그 양반은 아주 무뚝뚝하고, 신문 기자 어떤 놈들 왔다고, 그 렇게 뭐 싹싹하고 그런 게 아닌데다가. 오히려 내 아우하고는 친하게 지냈던가봐.  범 유영국 선생님 1964년도 첫 개인전 했을 때, 선생님께서 기사를 하나… 열 아마 그랬을 것 같애. 하여튼 옛날에는 다 댕기면서 기사를 몇 줄이건 간에 쓰는 게 관행이었거든. 그런 데 우 리 뭐 요즘은 어떻게 된 게, 그때는 워낙 가난한 시절이구 화가들이 그림으론 안 팔리고, 외롭고 그렇지 않겠 어요? 그런데 대학에 발이 붙은 사람은 그런대로 대외적으로 그럴싸하고. 기본 생활도 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 되지.그러니까 극도로 외로울 때지. 그러다 보니까 난 그냥 그 가난하고 외로운 화가들을 어떻 게 돕냐? 그게 내 항상 머릿 속에… 범 선생님 기사 속에 정서적 태도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열 아, 그렇게 봐 주면… 근데 실제로 그랬어요. 그 바람에 그때 그 친했던 분들은 평생 참 친교하고 지냈지 , 그 정을 다 아니까, 몇 사람들은. 박수근 선생님도 그거 때문에 참 신세지고 나 좋아하고. 첫째는 내가 그 양반 이 너무 좋아 가지고 남이 뭐라고 하나 마나 ** 그분을 높이 평가했죠. 범 그게 저 ****에다가『경향신문』에… 열 아, 그랬구만. 맞아, 그리고 그 시절에 책임감 있게 이름을 걸고 한 게 몇 없었거든. 뭐 더러 한 두 번 하 고 말 든가 하는데. 나는 끝날 때까지 그걸 썼으니까. 범 그렇게 하셨어요? 사실 쉽지 않은 일이죠. 열 신문사에서 그걸 허용했고. 나는 이게 내가 나름대로 책임감 갖고 쓴다하는 뜻이지. 그 양반만큼 친한 게 또 이구열(李龜烈, 1932- )의 기억 대담자 이구열(이하‘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소장) 이인범(이하‘범’, 상명대학교 교수) 일시 2012년 11월 5일, 오후 12:00-2:00 장소 일식당(서울 광화문 소재) 일러두기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는 중 해독되지 않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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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이대원 선생인데… 제2고보 동기고, 뭐 동기가 아니라 아무튼 동문이고. 이 양반이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고 성격이 ******** 이대원 선생님이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여기 조선호텔에 뒤에 있는 무슨 음식점인가? 음식점으로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가 보니까 소박하고 그때만 해도 우리도 안목도 낮고, 이렇 게 창 작적인 요소 같은 거에 대해서 감각이 모자라니까. 아마추어적인… 근데 이게 내가 아마추어라기 보담 도… 그때 그 반도화랑에서 만났던 것 같애. 박명자… 범 예, 그러셨을 것 같아요. 열 그때도 유영국 선생이 나와 가지고“이대원 선생 그림 어떻습니까?”그러니까 그 양반이 한 마디로“그거 그 아마추어야”그 양반 스타일이지. (웃음) 그러니까 미술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거지. 그러고 그림도 그게 뭐 냐. 그래서 내 기사에 아마추어라는 말이 나와요.  범 아, 그러세요? 열 기사를 제대로 친절하게 쓰고도 소박하고… 이 양반이 죽을 때까지 나를 만나면“당신이 나한테 아마추 어라 고 했어”아주 **** 너무 미안하고, 민망하더라구.  신상회, 현대미술연구소 범 선생님, 그 62년도에 신상회 만들 때,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잘 안 들어오거든요. 거기에 이대원 선생님이 상 당히 중심에 있으셨죠? 열 어… 그랬구나, 신상회 때? 범 네… 유영국 선생님은 뭐 한 두어 번 참여 하시다가 빠지시고. 열 둘이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야. 아주 저 유영국 선생은 무시하려고, 이대원이를 무시하기 때문에 .  범 현대미술연구소에 대해서 한 두어 번 정도 쓰셨어요. 그때. 그룹전으로 연구소 전람회 한 거… 열 연구소라는 건 뭔가? 범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엔 한봉덕(韓奉德, 1924-1997) 선생님, 유영국 선생님, 김병기(金秉騏, 1916- ) 선 생님 하시던… 59년도던데요, 선생님? 열 아, 아 그거 저 현대미술연구소? 그거 한봉덕 선생이 하던 거. 그거는 하여튼 기사를 썼던… 범 두 번을 쓰셨어요.  열 아, 그래요? 범 네.  열 근데, 그거 뭐… 범 59년이던데. 열 그때 뭐, 거기서 중요한 건 아닌데. 그런데도 신문사로서 ** 기사화 같은 거 겸해서 한 거지 사실. 그래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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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제8집 | 2012 가면 여러 사람 만나고 했으니까… 아이고 이거 나한테도 보내줬는데, 나도 갖고 있는데 그랬구나. 현대미술가연합 범 이제 4·19 일어나고 나서, 현대미술가연합, 미술가연합 ******* 그 기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셨죠? 열 아, 그때는 그 분위기가 생산적인 분위기를 부르니까, 그런 건 새로운 개혁이다고 하는 거예요. 요즘말로 . 범 핵심적인 이슈라고 생각 하셨던 거죠. 열 그렇지. 이런 것 들이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 한다. 범 근데 전 이해가 좀 안 가는 것 중에 하나가요. 유영국 선생님이 이런 거에 끼시는 거 그렇게 좋아하지 않 으셨 을 텐데 대표 위원을 했어요. 그때. 열 그, 옆에서 막 추대를 했다고… 순수하고 그러니까, 막 깨끗하고 이미지도 그러니까.  범 그때 깨끗하다는 이미지는 가지고 계셨군요.  열 그렇지, 그 사람은 정치하는데 이런데 끼어서 좌지우지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와서 설치는 게, 이게 김영주(金永周, 1920-1995), 그 다음에 김병기, 김병기는 좀 머리가 좋았어. 김병기 같은 사람은 속된 말로 아는 척하고 뭐 싸움도 잘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한봉덕이가『조선일보』에 있었는데. 그 한봉덕 씨는 아 까 얘기 했지만 여기 저 홍종인이에요. 그 조선일보 부사장하고 뭐 거물이지, 그분이 그 평안북도 분이거든, 한봉덕이도 그렇고.  범 그래서 현대미술연구소를 한봉덕 선생님을 통해서『조선일보』에서 만든 거군요. 열 현대미술연구소라는 거는 한봉덕이가 개인적으로 핸 걸로 기억나는데. 여기 광화문 옆에 있는 그 지금 큰 빌 딩 거기가 감리교 회단인가?감리교 제단이었어. 거기에 방을 하나 얻고, 미술연구소를 냈었어요, 한봉덕 이가.  범 그 빌딩이 어떤 빌딩이죠? 지금? 열 지금 큰 빌딩이 섰지, 옛날에 그게 감리교, 감리교… 범 국제극장 있던 자리요? 열 그래, 아주 제일 큰 빌딩. 범 면세점.  열 맞아요.  범 면세점 만든, 동화면세점인가.  열 그래서 거기서 미술연구소를 했는데 그거 할 때에 그걸 홍종인 선생이 도와줬던 것 같아. *** 그리고 홍 선생 이 아마추어 화가 아니에요 ? 그림을 그리려는, 그래서 날마다 가서 이제 자기도 그림 많이 그리고. 아마추어 많이 그리고, 필요하다면 누드모델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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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범 그런데 그 한봉덕 선생님하고, 유영국 선생님하고, 김병기 선생님이 선생을 했다고 그러는데. 열 그거는 한봉덕 선생이 두 사람을 끼고 들어 왔겠지. 이 양반이 그렇게 메리트가 있는 화가가 아니거든 한봉 덕이는. 그 때 이제 미술연구소나 하던 사람인데. 뭐 특별히 누구 말대로 일본 유학파도 아니고 또 무 슨 또 여기서 무슨 화단에 대한 업적이나 뭔가도 별로 없을 때야. 『조선일보』를 배경으로 근데『조선일보』… 범 아, 홍종인 선생님하고 가까운… 열 응, 근데 홍 선생이 한때는 문학 작가였지. 한봉덕이랑.  범 아 그래요? 열 이거 만들 때. 《현대작가초대전》을 할 때에 아마 내 기억엔 그래요.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은데 하여튼 했 어.  그 문화부장인가 문화차장 없이, 문화부 차장을 맨들면서 이《현대작가미술초대전》을 하도록 했다고.  그니 까 자기 가지고는 안 되니까 인제 몇 사람을 더 불렀지. 그때 근대미술을 최근 이론적으로 신문 잡지에 쓰면 서 현대미술을 추상하고, 그런 방향에 뭐를 해야 한다. 한국적으로 뭐 해야 된다라는 걸 앞장서 있는게 김병 기하고 김영주거든. 근데 그 두 사람이고, 유영국은 근대 뭐 이론 글 쓰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나마 김병 기 ** 들이 그 유영국을 좋아했던 것 같아. 그때 수화가 있는데, 수화가 그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표면적으로 이렇 게 부각됐던 존재가 아니거든. 범 유럽에 가 계셨으니까 그때는… 열 그렇지, 그런 것도 있고. 그리고 그 양반이 뭐 이론적으로 그렇게 나서는 분들도 아니고. 범 근데 4·19 직후에 현대미술가연합 그것에 대한 기대가 많이 있었어요? 열 글쎄 그랬다고 봐야지. 나도 뭐 사실은 분위기가 그랬거든, 하여튼 혁신해야 된다. 그동안의 구체제 가 지고 는 안 된다. 그니까 그래서 그 대표 하는 걸로 인제 조직을 아주 완전히 새롭게 바꿔야 된다. 범 근데 선생님께서 그래도 미술 기사를 처음 쓰시고 한참 영 제너레이션으로 이렇게 비전을 이렇게 띠우 는 게 50년대 말 60년대 혁명기, 혁명기에 그 새로운 무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네요. 열 그렇죠, 그때는 나처럼 적극적으로 좇아내 가지고 기사화를 헐려고 그러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기자가 . 그 니까 이제 다른 데는 그냥 뭐, 그때 그때 쓰면 쓰고, 안 쓰면 안 쓰면서 뭐 신문에는『동아일보』니, 뭐 다 그랬 고 . 그러니까 나는 그러니까 좇아다니면서 기사를 맨들고. 또 그러더라고 **에서 그러는 바람에 기사를 많이 썼지. 범 유영국 선생님에 대한 생각은 그 당시에 어떠셨어요? 열 그 양반은 그때도 그렇게 누구한테 눈에 반짝 뛰는 생동감있는 그림은 아니거든, 추상화가긴 추상화간데 . 그 뒤에 색깔이라던가 구상이 세련돼야지 그때는 그렇게 세련돼 보이지 않는 그림들이라… 범 아… 예. 열 그래 그게 평면적이고 뭐 이렇게 단순화 시키고 뭐 이렇게 저렇게 했으니까. 아 그 중에 그거 그리는 사 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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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제8집 | 2012 이 현대미술 운동했던 사람들이 그런 추상, 아니 전적인 추상하는 별로 없었을 때 얘기지. 수화는 뭐 나 중에 **도 그리고, 뭐 산도 그리고 그러니까 그랬는데. 그런데 아 그 양반 고집스럽다고 그럴까? 하여튼 그때 그 런 사람들도 그랬어. 이 사람은 먹을 게 많은 사람이 되어서 무슨 파를 낸다던가, 누구한테 뭐 생산적인 평 가 받 는 데는 의식 그런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고… 근데 그게 맞긴 맞는 거 같아. 그러니깐 뭐 재산도 많고… 그러 니까 유감없이 페인트도 쓰고, 캔버스도 좋은 거 쓰고. 그러고 [어디서 점잖게 초대할 때도 항시 정장 을 입 고] 세속적으로 뭐 개인전하고 뭐 해서 자기 뭐, 위치를 높인다든가 그런 생각이 없는 분이다… 근데 그 런 것 들이 깨끗하게 보이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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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유 영 국 미 술 문 화 재 단 활 동 전시 작품거래 도서발간 특별강연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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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제8집 | 2012 ▶전시 작품 R3 1938년(1979년 재제작), 65x90cm 작품 R4(L24-39.5) 1939년(1979년 재제작), 70x90cm 《한국미술 100년》展 일시_2011년 10월 20일-11월 21일) 장소_AKL Gallery (주)암웨이 출품작수_1점 Wor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05x105cm 《한국초상 10인의 지평》展 일시_2011년 12월 14일-2012년 2월 19일 장소_서울시립미술관 출품작수_3점 《코리안 랩소디-역사와 기억의 몽타주》展 일시_2011년 3월 17일-8월 1일 장소_삼성미술관 LEEUM 출품작수_2점 Work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Work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Wor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33x133cm 《교과서 속 우리미술》展 일시_2012년 1월 10일-2월 3일 장소_서울대학교미술관 출품작수_1점 Work 1970년, 캔버스에 유채, 136x1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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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Work 1972년, 캔버스에 유채, 135x135cm Wor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33x133cm Wor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05x105cm Work 1975년, 캔버스에 유채, 81x101cm Work 1979년, 캔버스에 유채, 105x105cm 직선 있는 구도 1949년, 캔버스에 유채, 53x45.5cm 물고기/언덕 1957년, 캔버스에 유채, 81x100cm Work 1950년, 캔버스에 유채, 53x46cm 《영남의 추상미술(Abstract painting in  yeongnam area)》展 일시_2012년 5월 31일-7월 29일 장소_포항시립미술관 출품작수_6점 《한국의 자연풍경(Natural scenes of Korea)》展 일시_2012년 4월 28일-7월 8일 장소_부산시립미술관 출품작수_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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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제8집 | 2012 산(지형) 1959년, 캔버스에 유채, 130x192cm 산 1957년,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Work 1993년, 캔버스에 유채, 64x90cm,  대한민국예술원 소장작 《두개의 모더니즘_Two Modernisms》展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20주년 특별전 일시_2012년 6월 6일-8월 19일 장소_광주시립미술관 출품작수_1점 《Deep & Wide》展 서울미술관 개관 기념 상설전 일시_2012년 8월 29일-11월 21일 장소_서울미술관 출품작수_1점 《대한민국예술원 소장작품전_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Academy of Arts》展 일시_2012년 6월 8일-6월 28일 장소_대한민국예술원 출품작수_1점 Work 1960년, 캔버스에 유채, 72.5x45cm Work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Wor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35x1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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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50년대 ▶10주기전 Work 1940년(1989년보수), 캔버스에 유채, 38x45cm 산 1957년, 캔버스에 유채, 60.6x50cm 계곡 1958년,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Work 1959년, 캔버스에 유채, 130x102cm Work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36x136cm Work 1968년, 캔버스에 유채, 81x81cm 60년대 70년대 산 1973년, 캔버스에 유채, 50x64.5cm 지붕 1974년, 캔버스에 유채, 65x91cm Work 1974년, 캔버스에 유채, 65x65cm Work 1975년, 캔버스에 유채, 53x72.7cm 일시_2011년 5월 18일-6월 17일 장소_갤러리 현대 출품작수_46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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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제8집 | 2012 Work 1977년, 캔버스에 유채, 105x105cm 산 1977년, 캔버스에 유채, 53x65.1cm 산사 1977년, 캔버스에 유채, 45x52cm Work 1978년, 캔버스에 유채, 61x73cm Work 1979년, 캔버스에 유채, 53x45.4cm Work 1979년, 캔버스에 유채, 60x73cm Work 1979년, 캔버스에 유채, 52.7x64.5cm Work 1975년, 캔버스에 유채, 60.2x73cm Work 1975년, 캔버스에 유채, 65x65cm Work 1976년, 캔버스에 유채, 60.6x72.7cm 산 1977년, 캔버스에 유채, 53x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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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Work 1979년, 캔버스에 유채, 72.7x90.9cm 80년대 Work 1979년, 캔버스에 유채, 50x60.6cm Work 1981년, 캔버스에 유채, 53x46cm Work 1981년, 캔버스에 유채, 53x45.8cm Work 1985년, 캔버스에 유채, 96.8x130.4cm Work 1980년, 캔버스에 유채, 52.7x64.5cm Work 1980년, 캔버스에 유채, 61x73cm Work 1980년, 캔버스에 유채, 81x100cm 산 1981년, 캔버스에 유채, 90.9x65.1cm 나무 1981년, 캔버스에 유채, 53x45.5cm 무제 1982년, 캔버스에 유채, 53x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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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제8집 | 2012 산월 1983년, 캔버스에 유채, 64x52cm 도시 1983년, 캔버스에 유채, 80x100cm Work 1985년, 캔버스에 유채, 53x65cm 산 A 1986년, 캔버스에 유채, 135x135/105x105cm Work 1986년, 캔버스에 유채, 65x80cm Work 1986년, 캔버스에 유채, 65.1x91cm Work 1989년, 캔버스에 유채, 53x73cm 움직이는 산 1989년, 캔버스에 유채, 65x91cm Work 1982년, 캔버스에 유채, 90.5x72.5cm 산 1979년, 캔버스에 유채, 72.7x90.9cm 산 1982년, 캔버스에 유채, 80x10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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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90년대 산 1991년, 캔버스에 유채, 72.7x100cm Work 1991년, 캔버스에 유채, 73x90cm Work 1990년, 캔버스에 유채, 100x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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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제8집 | 2012 ▶작품 거래 경매일시 2012년 6월 20일 경매장소 K옥션 신사동 추정가 90,000,000-120,000,000원 낙찰가 95,000,000원 제목 <나무> 제작년도 1980년 재료 캔버스에 유채 크기 50x60.6cm 경매일시 2012년 6월 20일 경매장소 K옥션 신사동 추정가 160,000,000-240,000,000원 낙찰가 170,000,000원 제목 Work 제작년도 1981년 재료 캔버스에 유채 크기 72.7x90.9cm 경매일시 2012년 5월 9일/온라인경매 추정가 800,000-1,500,000원 낙찰가 800,000원 제목 <산> 제작년도 1987년 재료 실크스크린 크기 33.5x42cm(ed. 91/150) 경매일시 2012년 1월 29일 경매장소 K옥션 신사동 (A. P) 1,500,000-120,000,000원 추정가 90,000,000-2,500,000원 낙찰가 1,500,000/$1,310 제목 <나무> 제작년도 1980년 재료 석판화 크기 35x42.5cm 경매일시 2011년 12월 29일 경매장소 K옥션 신사동 추정가 100,000,000-180,000,000원 $88,000-160,000 낙찰가 100,000,000 제목 <Work> 제작년도 1975년 재료 캔버스에 유채 크기 53x72.7cm 경매일시 2012년 5월 9일/온라인경매 경매장소 K옥션 추정가 800,000-1,500,000원 낙찰가 800,000원 제목 <산> 제작년도 미상 재료 실크스크린 크기 33.5x42cm(ed. 91/150) 경매일시 2011년 1월 7일 경매장소 K옥션 신사동 석판화 edition of 99  추정가 3,000,000-4,000,000원 $88,000-160,000 낙찰가 3,600,000원/$3,235 제목 <Work> 제작년도 1975년 크기 61x79.5cm 재료 석판화(edition of 99) K-Auction 경매일시 2011년 3월 25일 경매장소 K옥션 신사동 추정가 80,000,000-120,000,000원 $72,000-110,000 낙찰가 115,000,000/$101,518 제목 <Work> 제작년도 1979년 재료 캔버스에 유채 크기 53x65.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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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경매일시 2012년 9월 26일 경매장소 서울옥션 평창동 경매명 제 125회 2012년 9월 미술품 경매 추정가 80,000,000-120,000,000원 낙찰가 70,000,000원 제목 <Work> 제작년도 1981년 재료 캔버스에 유채 크기 60.7x50.2cm 경매일시 2012년 3월 20일 경매장소 서울옥션 평창동 경매명 제 123회 lot.61 추정가 180,000,000-300,000,000원 $160,800-267,900 낙찰가 360,000,000원 제목 <Work> 제작년도 1987년 재료 캔버스에 유채 크기 135x135cm 서울-Auction 1 2 3 경매일시 2012년 12월 12일 경매장소 서울옥션 평창동 경매명 제 126회 lot.197 1. Lithograph 34.2x42cm ed.128/150 signed on the low 2. Lithograph 35x43cm ed.102/150 signed on the low 3. Lithograph 35.2x42cm ed.127/150 signed on the low 추정가 2,400,000-3,600,000원 낙찰가 2,8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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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제8집 | 2012 ▶도서발간 오광수, 『유영국-삶과 창조의 지평』, 마로니에 북스, 2012 판형(21x15.2cm), 251쪽. 『유영국』, 마로니에북스, 2012 판형(28.2x28.2cm), 305쪽. ▶특별강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0주기전》(2012. 5. 18-6. 17, 갤러리현대 강남) 부대행사 주제 | ‘유영국의 삶과 추상예술: 자유정신과 자연을 향한 랩소디’ 강사 | 이인범 상명대 교수 일시 | 2012년5월25일 오후2시-4시 장소 |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0-6 아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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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알림 1: 학술연구 및 조사활동 지원사업 유영국미술문화재단에서는 다음과 같이 학술 조사연구활동을 지원합니다. 그 내용은 화가 유영국의 작품세계나 추상미술에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관심있는 연구 단체나 개인은 다음 요강에 따라 응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1 . 지원대상 • 대상자| 미술관련 연구단체 혹은 개인 연구자 • 지원대상자 수| 1개 단체 혹은1인 연구자 2 . 지원대상사업| 학술대회 개최 및 학술지 발간,  조사연구프로젝트 등 3. 지원 금액| 500만원 이내 4 . 응모 기간| 2013년11월11일까지 5. 제출 서류| 지원신청서 지원신청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 신청 주체(단체 혹은 개인명, 주소, 인터넷주소,  전화번호, E-mail 등) • 사업명 • 사업기간 및 장소 • 총 소요액 및 신청금액 • 신청주체 계좌(은행명, 계좌번호) • 첨부서류 및 자료 목록 • 세부사업내용(담당자, 프로그램 등) • 예산내역(수입, 지출) • 활동실적 6. 제출처| 서울 강남구 삼성동 114-44 Decks 빌딩,  tel 02 561 6090 알림 2: 고 유영국 화백 전작도록 발간사업 추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에서는 고 유영국 화백의전작도록 발간사업을 다음과 같이 추진 중에 있습니다. 유영국화백의 탄신 100주기를 기념하여 간행할 것을 목표로 추진되는 전작도록 발간사업에 작품 및 자료 소장자, 관련 정보를 갖고 계신 여러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다음 1 . 사업명| 유영국 화백 전작도록 발간사업 2 . 주최| 유영국미술문화재단 3. 주관| 유영국화백전작도록발간사업추진위원회(추후구성) 4 . 사업완료 예상 시점| 2016년8월 5. 책자 및 자료 발간 형식| 추후 결정 6. 책자내용| 유영국 화백 작품 도판 전부, 비평문, 활동사진 등 각종 작가 생애 관련 자료 등.  7. 기타 • 구체적인 계획은 추후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추후 공고할 예정입니다. • 자세한 사항이나 제보 내용은 다음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사무국으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114-44 Decks 빌딩, tel 02 561 6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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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제8집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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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편집후기 창간 이후 화가 유영국의 활동자료들을 발굴 조사하여 영인하는 작업은『유영국 저널』의 핵심적인 관심사 가운 데 하나였다. 이번 제8집에서는 1973년부터 1978년에 이르는 시기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서 이순(耳順)의 나이로 접어들던 때이지만,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삶의 전개에서 이 시기에 화가 유영국이 겪은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작지 않다. 1968년부터 지속되던 강렬한 색채의 순수 기하학적 추상 작업은 이 시기에 들어 한국의 일상 적 자연이나 산사·고궁 같은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소재로 한 유기적인 형상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초 지일관 아방가르드적인 태도로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을 이끌며 활동해 온 그이지만, 환갑을 맞던 해인 1975년에 개최된 제5회 개인전에서는 생애 최초로 작품을 판매하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한국 미술계의 한 중심에서 개인전이나 이 시기 의 각종 기획전시 관련 기사,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잡지 표지화 등에서 유영국 화백의 활동 흔적은 그 이전 시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폭넓고 양적으로 방대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 후반에 들어 심근경색으로 심각한 수술을 받 아야 했으며, 서울상경 이후 30년 가까이 살았던 약수동 집에서 떠나 여전히 자연 풍경이 잔존하던 등촌동으로 거처를 옮기며 또 한 차례의 화풍의 변화를 예고해 주고 있다.  이번 호에도 유 화백의 부인인 김기순 여사의 인터뷰를 발췌하여 실었다. 더불어, 경향신문 기자로서 1964년에 열린 유영국 화백의 제1회 개인전의 리뷰를 실명으로 기고했으며 미술평론가이자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자의 길을 걸 어 온 이구열 선생님, 그리고 큐레이터로서 1996년에 개최된 호암미술관 초대전을 담당했던 박천남 선생(현재 성곡미술 관 학예실장)의 현장 체험 기억을 구술 채록하여 실었다.  짧지만 이번 호에 일본 홋카이도아사카와미술관(北海道立旭川美術館) 학예과장 이우치 가츠에(井內 佳津惠) 선 생이 유영국 화백의 제2고보시절 미술교사였던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에관한조사연구 논문을 싣게 된 것은 매우 기 쁘다. 사토 구니오는 제2고보에서 미술교사로서 활동했으며 훗날 그의 제자들이《2·9전》을 결성하여 그에 대한 기억을 기리는 데에서도 잘 확인되듯이 유영국 화백뿐만 아니라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이대원, 권옥연 같은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 전개에서 큰 비중을 지닌 여러 화가들이 청운의 꿈을 품게 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향후의 우리 근 현대미술사 연구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리라 기대된다. 더불어 유영국 화백의 작품세계 연구로 석사학위논문을 제 출한 이후 현재 멀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유학 중인 정하윤 선생의 논문과 그리고 한국 아방가르디즘의 전개사라는 관점에서 유영국 화백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짚어 연구에 또 다른 진전을 보여 주고 있는 김주원 선생의 논고 역시『유영 국 저널』간행의 의미를 두텁게 해주고 있다. 모든 구술자·연구자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호 발간이 터무니없이 늦어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의 게으름과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다. 독자 여러분 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 전해 드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유영국 저널』제8집에도 귀한 연구논문들과 적지 않은 자 료들이 새롭게 모이게 되었다. 이러한 귀한 자료들이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 주신 여러분께 다소나마 위로가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번에도 학위논문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책의 편집을 주도해 준 김주원 선생, 그리고 이를 열성으로 보조 해 준 국립현대미술관의 한정민, 최지나 두 분의 헌신적인 노력과 연구자적 관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더불어 이 모든 자료와 연구논문들을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느라 수고해 주신 김보경 디자이너께 감사드린다. 편집인 이인범